고백하건대, 5년 9개월간 살았던 이사오기 전 집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집은 위치는 완벽히 편리했지만 건물 자체가 연식에 비해 더 낡았고, 전에 살던 사람들이 관리를 형편없이 한 바람에 (세입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뭔가를 뜯거나 고쳐야 했으며, 수납공간이 부족한데다가 어린이 둘을 포함하는 네명이 살기에 좁았다. (특히 미취학 어린이는 정말 짐이 많다.) 그 집에서 가장 불편했던 부엌은 원룸 사이즈였는데 요리도 아닌 생존음식을 차려내는 데도 몇번을 치우고 닦고 썰고를 반복하다 결국 ‘아… 좁아…’라고 매일 탄식하게 만들었다.

정리를 하지 않으면 잠이 안오는 내가 정리를 하다하다 포기하고(그때는 애들이 어려서 더더욱 시간이 없었지…) 몇해를 살았다. 내 기준으로 늘 난장판이었기에 집에 들어가도 내집이 주는 편안함이 없었고, 아무도 집에 초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정리안된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집에서 5년을 살았을 때 깊이 깨달았다. ‘나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어.’ 매일 청소를 하는데 너저분했고 티가 안났으며 나의 노력을 갈아넣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의 환경이 나를 끝도 없이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완벽주의 성향의 집순이를 정리 안된 집에 5년 넣으면 마음의 병이 생긴다는 걸 경험했다.(물론 모든 원인이 집 때문은 아님) 그 후 9개월을 더 꾸역꾸역 참으며, 가족의 물심양면 도움을 받으며 살았고 드디어 탈출했다.

이사하며 온갖 것을 버리고 대부분의 것을 새로 구축했고(구축이라는 표현이 적절), 정리에 몰두했다. 3주를 꼬박 집에만 오면 누워 자는 시간만 빼고 하루종일 정리와 청소를 했다. (같이 사는 사람 미안해…)

마음의 평온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비록 이석증이 찾아오고;;; 아직 할 일이 남았지만(살면서 정리한다는 말을 이해 못하는 사람) 그래도 이제 누워 쉬어도 맘이 편하고 누굴 초대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 집이 됐다.

이번에 깨달은 건,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건 체력이라는 것. 이사 과정에서 무수한 비닐을 사용하고 분리수거를 했고 물티슈를 사용하게 됐다. (우리집 물티슈 안산지 5년 넘음) 근데 몸이 지치면 분리수거가 아니라 다 때려 박아 버리고, 물티슈를 더욱 많이 썼다. 당근마켓에 나눔하려던 물건들도 순간 꼴보기 싫어지며 내다 버렸다. 조금만 기운이 있었어도 지구에 쓰레기를 보태진 않았을텐데… 하는 죄책감을 한 달 가까이 느껴야했다.

결론 : 다들 이제 운동하세요. 그럴 나이입니다.


윤종신 콘서트를 처음 간 건 무려 95년도 였다. 당시  M-net 건물이 지금의 학동역 근처에 있었는데 오후에 있던 콘서트 자리를 맡기 위해 새벽 4시에 줄을 서러 갔다.(12시간 기다렸다는 소리) 그 땐 티켓은 은행에서 샀던가, 뭐 암튼 그랬고 자리는 지정좌석이 아니고(당연하지 전국 각지 은행에서 파는 건데) 무조건 선착순이었다. 표를 샀다고 끝난게 아니라 자리를 위해 새벽에 갔어야 하는 것. 근데 우리 앞에 이미 세 팀이 있었고…;;;

아무튼 이 뮤지션은 나의 학창시절을 함께 한 사람이었고, 20대에도 30대에도 모든 앨범을 열심히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정환과 유튜브를 한다고 해서 잠시 이별했었지만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 가을 콘서트 티켓팅 성공. 윤종신 공연 안간지 오래 되었는데 소극장 콘서트라서 서둘렀다.

성공한 티케팅이었기에 자리가 좋았다. 다만… 오늘의 관객 중 가장 키도 크고 등도 넓은 것 같은 사람이 내 앞이었다는 슬픈 사실. 다행히 가수와 나는 약간 대각선이었기에 가수를 무사히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혼자 간 공연이어서 관객들을 자세히 둘러볼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 남자 관객 수가 절반쯤 되었던 것 같고(보통 여자가 훨씬 많아…) 더 신기한건 혼자 온 남자 관객이 많았다. (보통 혼자 온 사람은 여자가 더 많아…) 그리고 연령대도 다양해서 나를 기준으로 위아래 열살씩은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신한 플레이 라이브홀 의자 진짜 꼬져… 요새 대학로 소극장도 이 보다는 좋던데. 왜 그 하나로 쭉 붙어있어서 한 사람 움직이면 그 줄 사람 다 몸 흔들리는 그런 의자. 쿠션감 후지고 가로폭도 좁아서 어깨가 다 말리는 기분.

공연곡은 월간 윤종신 중심으로 짜여졌다. 젊은 윤종신의 대표 히트곡은 전혀 부르지 않았고(예를 들면 너의 결혼식, 오래전 그날) 가장 옛날 노래는 annie 였는데 하… 나 이 노래 또 완전 좋아해서 내적 떼창을 했네. “야~ 이 바보야~ 난 널 사랑하고 있어~“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와 함께 나이 먹는 건 이런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사랑 노래를 실컷 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 인생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말하는 노래를 하고 있었다. 공연장에서 노래를 들으며 ‘이별택시’의 슬픈 가사에 ‘으아 너무 슬퍼’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내가 눈물을 주룩 흘렸던 건 ‘기다리지 말아요’였다. 슬프단 생각을 하기도 전에 마음을 건드렸던 노래. 정작 그 노래가 발표된 시절에는 아무 감흥이 없었는데 3년 사이 나도 더 어른이 된 것이겠지.

노래만 하던 가수를 지나 잘 나가던 예능인을 거쳐 다시 노래하는 사람을 돌아온 느낌. 그리고 지금의 노래는 20여년 전의 노래와는 목소리 만큼이나 많이 달라졌다. (텅빈거리에서를 생각해보라)

더이상 내가 좋아했던 과거의 윤종신은 없지만, 그런 과거를 함께 공유하며 지금의 음악을 만드는 윤종신이 있었다. 툭툭 치고 나오는 유머는 여전했고. 그는 음악을 만들며 삶을 살아가고, 나는 나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사람이 살면서 고민하고 힘든 것 결국 같은 지점인 것 같다. 그의 노래와 생각을 많이 들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네.

오늘의 뭉클함을 기억하며 나는 또 일상을 살아가야겠지.

자고 일어났더니 긴 꿈을 꾼 기분이다. 분명 어제까지 현실이었는데. 아무튼 남겨보는 여행기.

나는 일상에 시달리면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하다. 그건 요즘 유행하는 MBTI 분류법에 따르면 I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혼자 떠난 여행. 정확히는 출장에 붙여서 좀 더 쉬어보는 여행. 중간중간 일행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욕구나 상태(특히 어린이)를 고려하지 않고 다닐 수 있다는 건 아주 가벼운 것이었다.

짐이 아주 적어지고(내가 원래 짐이 많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대처해야할 비상 상황 경우의 수도 매우 줄어든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화장실 다녀왔냐는 질문도 하지않고…(이게 은근 스트레스) 메뉴도 그냥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면 되고 먹고 싶을 때 먹으면 된다는 게, 기본 욕구를 해결하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참으로 많은 걸 간단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닌 삶에 익숙해진 걸 확인한 시간이기도 하다. 편한데 허전한 시간. 이건 짝꿍이랑 먹었으면 좋았을텐데, 여긴 어린이들이 좋아했던 곳이지. 그리고 세번째 밤 잠자리에 들며 생각했다. ‘아, 이제 내 이불로 가고 싶다.’

혼자 떠나고 싶었고, 적당히 잘 다녔고, 집에 돌아왔다.
내가 뭘 하고 다녔나 사진으로 정리해본다.

출발합니다
뭉게뭉게뭉게구름
루시드폴은 못만났지만 폴부엌은 가봄(같은 폴 아님)
산양큰엉곶
책방 소리소문
판포리
이런 창이 있는 제주집에 살고파
진짜 날씨 좋던 금능해변
신난 발
각재기국
멜튀김
춘식이콘
한밤중 달 뜬 중문색달해변(해 아님 주의)
골프공 파는 중문 하나로마트
제주 체험학습 귤나무
깨발랄 스누피
무사레코즈
내가 좋아하는 하도리
소면이 짱인 돌문어볶음
분위기 있는 게하 조식
소심한 책방
스누피가든 스탬프 투어와 기념품
비오는 칠분의 오
진짜 고기 같았던 비건버거 플레이트
바다뷰 카페
추억이 잔뜩인 김녕 바다
전복솥밥
육지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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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1-5일차도 없는데 난데없는 6일차 ㅋㅋㅋㅋㅋㅋ 하지만 6일차여서 제목을 그렇게 붙여봤다.)

인류는 COVID-19라는 녀석을 만나 전례 없는 전 세계적 고생을 하고 있다. 아무리 지구인이 모두 위험하다해도 마스크 잘 쓰고 다니면 무탈할 줄 알았는데 졸지에 자가격리자가 된 썰을 풀어보자.



D-day
어린이의 학교에서 오전10:17에 전화가 왔다. 난 10:00에 출근했는데. 이런 시각의 전화는 대체로 불길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어린이 학급에서 확진자가 발생해 모두 귀가조치+코로나 검사를 해야한단다. 하루종일 회의가 잡혀있던 날이라 급히 동거인에게 전화해 귀가시켰다.

그리고 그날 저녁6시반 무렵. 평온하게 저녁밥 준비를 하려는데 카톡이 하나 왔다. 역학조사 결과 어린이는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어 즉시 자가격리에 들어가며, 보호자 1인도 함께 자가격리라고. (아 뭐라고 이것드라????)

저녁밥이고 뭐고 영혼이 나간채로 덩그러니 30분을 앉아있었다. 영혼은 나갔지만 극j형 인간답게 당장 일주일간의 일정을 머리속에서 다 조율하고 나서야 밥을 먹었다.

D+1
보건소에서 오전10시경 전화가 왔다.
자가격리 통지서와 키트가 집으로 비대면 배송될거고, 담당 공무원이 배정되면 연락이 올거고 지침을 다시 알려줄거다.

하루종일 기다려도 아무 연락도 안온다. 나보다 며칠 먼저 자가격리 체험을 하고 있는 친구 얘기에 따르면 앱을 깔고 매일 체온 측정을 하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데 그냥 방치되고 있는 우리.

보건소에 오후5시에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한시간 뒤 퇴근할테니.

우리구에 자가격리자가 많아져 처리가 늦어지고 있고 연휴라 다음주 화요일에 해준다고… 아니 지금 자가격리 시킨게 우리를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그런거 아냐? 감시 안해? 국민을 겁나 신뢰하는구만?

D+5(6일차,오늘)
키트 왔고(키트래봐야 진짜 뭐 별거 없음) 앱 깔라는 문자도 왔다. 생각보다 시시해서 실망.

우리는 착실하게 집에서 나가지 않고 잘 살고 있다. 나야 워낙 집에 있는게 좋으니 괜찮은데 어린이는 그네가 너무 타고 싶다고… 그리고 동거 어린이는 등교를 위해 이틀에 한 번씩 코로나19 pcr 검사를 받아야하는 형벌을 받고 있다. 그래도 어린이 입장에서 감금보단 코찔림이 낫지…

직장도 리모트워크 가능한 직장이라 괜찮은데, 모니터와 키보드가 너무 불편해 죽을맛이다. 모니터 사고 싶고 키보드 사고 싶은데 매일 참는 중. 왜냐면 나는 비싼거 사고 싶으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자가격리 당해도 괜찮을 줄 알고는 있었는데 예상보다 더 괜찮아서 나 스스로도 ‘이 정도로 집순이었다니!’ 놀라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배달시스템에 박수를 보낸다. 안오는게 없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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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족들을 서울에 버리고 두고 제주로 여행 온 이유를 말해보려한다. 제주에서 난생 처음으로 “술을 제법 마신다”는 칭찬(!)을 듣고 맛있는 맥주를 마신, 여행의 둘째날 밤이자 마지막 밤인 지금이야말로 그 얘기를 하기에 적절한 때다.

고기지글지글 얘기를 친구와 하다가 고기먹으러 제주 가잔 말을 친구가 던졌고 나는 진심으로 받았다. 먹는거엔 늘 진심인 사람들이니까.

일상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안다. 내가 힘들어지고 있는 걸. 여러 시그널이 있을 수 있지만 이번엔 다른 이의 불평 혹은 비판 혹은 부정적 얘기가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나를 향한 얘기도 아니고, 그게 나를 향한 얘기로 들리는 것도 아니다. 그냥 누군가를(혹은 물건을) 향한 그 어떤 부정적 얘기도 듣기가 힘들어지는 날들이었다.

보통의 나(보통이란 무엇인가... 쓰고 보니 무엇이 보통인지 모르겠다),  평온한 마음의 나였더라면 ‘아 너는 지금 그때 화가 난 것을 표현하고 싶구나’, ‘아 당신은 지금 무척 애쓴 걸 인정받고 싶군요’ 이렇게 알아듣고 그에 맞는 반응을 했을텐데 요즈음의 나는 그냥 듣기가 싫고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복잡해지고 책임이 무거워지는 조직에서의 역할, 학년이 올라갈 수록 신경써야하는 것이 많아지는 엄마로서의 역할 모두 양은 많아지는데 완벽하고 싶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 나는 달라지지 않고... 나는 내 자아실현도 해야하는데 내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체력마저 모든게 나의 욕심인데 안내려놔진다. 뭐... 이번생은 글렀어.

제주에 내가 뭘 원해서 왔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그냥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인가, 나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가, 자연에 있고 싶었던 것인가... 이틀째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뭘 정말 좋아하는지 정확히 확인했는데 조용한 바닷가에서 캠핑의자에 앉아 책을 실컷 읽고 싶다. 다음엔 제주에 꼭 캠핑의자를 들고와야지. 차 없이 와서 바닷가에서 캔맥주 먹어야지. 소심한책방에서 책 더 많이 사야지.

내 비록 서울에 두고 왔지만 여행 다녀오라고 해준 가족들 고마워. 잘 놀고 오라고 공항철도역까지 데려다준 동거인 고마워, ‘잘 있어?’라고 물어봐주고 ‘엄마 잘 있어~’라고 말해준 우리 귀여운 딸 고마워, 엄마 대신 꼼꼼히 달팽이 돌봐주고 뭐했는지 자세히 말해준 우리 아들 고마워. 나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이 자라서 갈게. 너희들도 모두 한뼘씩 자라있길.🙂

그리고 무계획으로 온 나를 이끌어주고 지나치게 많이 먹이고(이틀 내내 하루종일 배부름...) 까다로운 나를 견뎌준 내 친구 고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지막 온전한 하루.
제주를 떠나는 내일은 아침나절 내내 한달 동안 살았던 집을 정리하는 날일테니 아마도 정신이 없겠지. 그렇다면 제주에서의 마지막 온전한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가 못한 것들을 몰아서 해볼까? 하지만 좀 더 차분하게 그간 우리가 했던 것 중 또 하고 싶었던 것을을 떠올려보며 한 번 더 가볼 곳을 두개 정도 고르면 어떨까? 이 정도로만 고민하고 아침밥 먹는 애들과 얘기를 나눴다. 너희는 어떤게 좋겠어?

"좋았던 걸 또 하는게 좋겠어!"

그렇다면 우리가 좋았던 것은 뭐가 있을까. 박물관도 갔었고 바다에도 갔고, 절물휴양림, 만장굴, 선흘분교, 오름도 갔었는데 각자 좋았던 곳을 두개씩 고르기로 했다. 첫째는 오름과 절물을 골랐고, 둘째는 바다와 절물을 골랐다. 나는 바다와 선흘분교를 골랐다. 짝꿍은 바다와 절물을 골랐다. 그래서 투표결과는 바다와 절물휴양림. 바다는 우리가 좋아하는 김녕성세기 해변. 어디부터 가야하나 고민하는데 첫째가 절물부터 가자고 한다. 바다는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복잡하니까. 오... 똘똘한데? ㅋㅋㅋ

간식을 싸가지고 절물로 향했다. 간식은 냉장고에 남아있던 오메기떡 세알을 챙기고, 달걀 세알을 삶아서 챙기고. 남은 과자들과 귤들을 챙겼다. 그런데 오후에 갈 바다 짐까지 싸야하니 너무 바빴다. 아침 일찍 서둘렀으나 결국 11시 출발. 아이들과 움직이면 아무리 서둘러도 11시에 집을 나서게 되는구나. ㅠㅠ 

지난번 절물에 왔을때는 서늘해서 추울 정도였는데 오늘은 습도가 높고 더웠다. 숲 한가운데 있으면 그나마 바람이 불때 시원한 감이 있는데 햇볕이 쬐는 길은 너무 더웠다. 온몸이 끈끈해지는 기분. 숲은 상쾌하려고 오는건데 아우... 제주의 여름을 마지막 날에서야 제대로 알게 됐다. 역시 가을에 와야되나봐... 그래도 절물의 삼나무는 아름다웠고 숲길은 포근했다. 두 번째 오는건 그것대로 맛이 있어서 아이들은 '지난 번엔~'하며 첫번째 방문을 기억했고 소소하게 달라진 것과 여전히 같은 것들을 말하느라 바빴다. 지난번에 너무 추워서 못했던 족욕장에 가서 발도 담갔다. 얼음장같이 찼지만 이래서 발을 담그는구나... 싶게 시원했다. 여름은 이런데서 보내는거지. 중간중간 나오는 쉼터에서 소소하게 간식 먹고 고리던지기도 하고 놀고 알차게 숲을 즐겼다.

정신없이 놀다보니 한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일단 가장 가까운 눈에 보이는 밥집에 들어가 밥을 먹으며 이후 동선을 짜본다. 원래 김녕에 가려고 했으나... 절물 가는 길에 눈에 들어온 '승마체험' 글씨를 보고 아빠가 오면 말타러 가기로 한 걸 기억해낸 남매들로 인해 계획변경. 그럼 내친김에 말도 타고 카약도 타자!

찾아보니 애들이 좋아할 승마체험장이 있었다. 옛날 승마장들이 주로 말을 타고 승마를 배우는 것이었다면, 여긴 먹이주기 체험도 하고 카페도 운영하고 부모와 아이가 시원하게 말을 한 번 타보는 경험을 하는 곳. 이런게 장사지... 라는 생각을 했다. 가족사진을 찍어주고 비싼 값에 사진을 판단 글을 블로그에서 봤는데 '막상 보면 안 살 수가 없어요'란 말을 보고 불길했다. 뭔지 너무 알겠는 그런 느낌... 사진 결과물은 역시... 이렇게 좋은 렌즈로 이렇게 예쁘게 애들을 찍어줬는데 안살 부모가 어딨어! 흑흑... 샀다. 전혀 강매하지 않았고 아무런 압박도 하지 않았고 단지 사진만 보여줬는데 그게 최고의 상술이었으며 알면서 샀다. 우리 추억을 돈주고 사자. 의미 있어! ㅋㅋㅋ

마지막 여행지는 하도리. 여긴 우리 부부가 아주 예전부터 좋아하던 곳이다. 철새도래지가 옆에 있고 하도리는 물이 빠지면 정말 가도가도 바닷물이 무릎까지도 오지 않는 곳이다. 드디어 카약 탑승! 예상은 했지만 애 둘을 데리고 카약을 타는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배 하나에 탈 수 없어 두개를 묶었더니 더더욱 ㅋㅋㅋㅋ) 속도감이 나서 쭉쭉 가야 재밌을텐데 마침 바람이 세서 어른 둘이(사실 내가 0.5인분의 힘...) 바람을 이기고 가려니 팔과 어깨가 너무 아팠다. 30분 탔기에 망정이지 1시간 탔으면 쓰러졌을 듯 ㅋㅋㅋ

카약에서 내려 마지막 바다놀이를 했다. 나는 바닷물이 찰랑한 모래에 앉아 제주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봤고, 첫째는 아빠랑 돌 틈에서 뭘 잡느라 바빴고, 둘째는 물놀이 모래놀이를 했다. 날이 더워 6시 넘어서도 바닷가엔 사람이 많았고 우리도 그렇게 거의 7시가 되도록 바다에서 놀았다. 이날 바다에서 가장 아쉬운 사람은 나였다. 그냥 그렇게 계속 앉아있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함덕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집과 미리 사두었는데 비가 너무 오는 바람에 결국 마지막 날에... 스파클러 200개를 샀더니 아주 원없이 신나게 반짝거리고 놀았다. 반짝반짝. 우리의 한달도 그렇게 반짝거렸지.

절물의 내 사랑들
긴장한 첫째
노를 저어라~
내사랑 하도리
제주의 마지막 저녁 풍경
마지막 일요일, 멘도롱장에서 산 모자와 원피스. 가방은 여행초반에 성산에서 샀는데 제주살이 내내 엄청 잘 썼다. 나 엄청 신났네 ㅋㅋㅋ

오늘은 오늘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을 좀 써야겠다.

어제까지 이렇지 않았는데 오늘은 정말 서울에 간다는 것이 인지된다. 중간중간 아이들이 말을 안듣고 뭔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을때, 나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을때, 체력이 딸려 혼자 모든 걸 해내기 벅찰 때 서울로 가고 싶었다. 안정적인 나의 공간 내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고 익숙했던 나의 패턴대로 살고 싶었다.

그런데... 한달이란 시간은 이곳의 삶과 시간을 나의 패턴으로 만들었다. 서울가면 밀려들 (내 능력으로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은) 일들, 계속해서 주어지는 내 역할, 시간에 쫓기는 삶, 넘치는 관계들이 있겠지.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서울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내고 있었던 것일까.

서울을 떠나 제주로 오면서 그것들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하게 살고 싶었다. 잠시 그것들을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완벽히 벗어나 살았고 그런 재미를 깨달아가고 있다. 바로 그런 시점에 나는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하루는 썩 괜찮았다. 
아침부터 짐을 간단하게 꾸려 상자 하나를 서울집으로 부쳤고, 카약도 타고 바다놀이도 하기 위해 하도리로 갔다. 예기치 못하게 하도리-평대까지 비가 쏟아졌고 종달 부근을 지나던 식당에서 소라도 먹고 성게미역국에 회덮밥도 먹었다. 

하도바다에서 조개잡고 놀고 싶었지만 비가 갑자기 많이 내려서 월정리로 갔다. 월정바다는 맑고 모래사장도 깨끗하고(처음으로 미역이 없는 바다였음) 좋았지만 젊은이들이 많아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음악이 들렸고(게다가 내가 싫어하는 최신댄스곡과 EDM...) 발만 씻는데도 500원을 받는 야박한 곳이었다. 아이들과는 물놀이를 하러 다신 오지 않을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집 녀석들은 아주 즐겁게 물놀이를 했다. 둘째가 잠시 해파리에 쏘이는 사건이 있었지만 다행히 가라앉았다.

집에 돌아와 어린이들은 낮잠을 잤고 나와 짝꿍은 저녁먹을 채비를 했다. 맛있고 후회없는 곳에서 회를 먹고 싶었으나... 애들이랑 움직이기엔 시간이 이미 늦어버려(게다가 이웃집의 지인도 같이 먹는 바람에...) 집근처에서 사올 곳을 찾았다. 하지만 찾은 곳들은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횟집들이어서 우리의 선택은 어처구니 없게도 하나로마트. 아쉽지만 가성비로 따지면 훌륭하다...라고 우리들을 스스로 다독이며 매운탕거리까지 장을 봐왔다. 

늦은밤 집을 치우다 뭔가 크게 잘못됐단걸 깨달았다. 한달살이의 우리는 어디가고 여행자가 되었단 말인가. 내년에 한달살이를 다시 하게 된다면 손님은 받되 여행은 셀프로 해야지. 나는 나의 속도로 살고 싶다. 그걸 하고 싶어서 이 먼 곳에 소중한 시간을 들여 온 것이 아닌가. 하루남은 평범한 일상을 평범하고 조용히 마무리하고 가야겠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하늘의 월정리 바다
해파리에 쏘였다.
오늘도 친구의 유니콘을 빌려타고
오늘도 모래를 판다.

 

아빠가 오면 하기로 한 여러가지 것들 중 오름오르기가 있었다. 아빠가 온 이후에 태풍도 함께 오는 바람에 오르지 못했다가 비가 그친 첫 날 오름에 갔다. 우리가 선택한 곳은 아부오름. 아이들과 오르기 쉬운 오름이고 동쪽에 있는 곳으로 주변 여럿의 추천이 있었다. 

아부오름에 도착하니 아래엔 소가 여러마리 있다. 신나서 소 옆에서 사진도 찍고 소 얼굴도 보고 그 옆 송아지도 보고 하는데 갑자기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소가 다가온다. "무서워..." 둘째가 사색이 되어 나에게 나가오고 사실 나도 너무 무서웠지만 내색하고 있지 않다가 짝꿍에게 속삭인다. "나도 너무 무서워..." ㅜㅜ 소를 피해 오름에 본격적으로 오른다. 경사가 가파르다더니 으앗 예상보다 가파르다. 계속 이렇다면 둘째는 못갈 것 같은데 이를 어쩌나... 싶을 때 쯤 정상이 보인다. "다 왔다! 저기다!"라고 하자 "힘들어..."를 호소하던 녀석도 힘을 낸다. 끝에 오르자마자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어서 아이들을 격려한다. (나 스스로도 힘을 내본다) 

오름 자체가 힘들다기 보다는 태풍의 영향으로 이틀간 거의 물폭탄이 떨어져서 땅이 젖어있는데 아침부터 햇볕이 쨍쨍하니 땅의 모든 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오름 둘레길(뭐라고 불러얄지...)에 서 있는데 습식사우나에 서 있는 기분. 지면에서 뜨끈한 수증기가 올라와 마치 찜통 위의 만두 같다.

그래도 숲길도 지나고 고사리도 보고, 공벌레도 보고, 나비도 보고, 꽃도 보고, 버섯도 보고 온갖것들을 구경하고 말도 걸며 걸으니 즐거웠다. 첫째는 "엄마, 여기 풀들이 우리한테 인사하는 것 같아. '안녕~안녕~' 이렇게 몸을 흔들어."라는 예쁜 말을 남겼고 둘쨰는 "엄마, 새들이 우리가 반가워서 인사하나봐."라고 거들었다. 온갖 새들이 예쁜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내가 너희의 그런 예쁜 마음을 만나고 예쁜 말을 들으려고 오름에 온거구나. 나도 너무 좋다 요 예쁘고 귀여운 녀석들아.

반바퀴쯤 돌았을까... 숲이 사라지고 오름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지형으로 접어든다. 아... 이것이 오름이구나... 감탄도 잠시... 무더위와 다시 만난다. 지열과 함께 수증기는 올라오고 햇볕은 쨍쨍 내리쬐고 어른도 아이도 땀이 주루룩 흐른다. 중간에 웨딩촬영하는 커플을 둘이나 만났는데 한복입은 팀은 보기만 해도 안쓰러웠다. 얼마나 더울까. (다음에 오름에 온다면 난 꼭 서늘한 날 와야지...)

오름을 돌며 먹기 위해 김밥을 사와서 중간중간 쉬며 먹다가 다 돌면 먹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더위에 김밥이고 뭐고... 시원한 걸 마시고 싶어졌다. 점심시간이지만 점심이고 뭐고 카페로카페로... 지나다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서니 예쁘고, 시원하고, 친절하시다. 우리집 두 녀석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짝꿍은 아아, 너무 힘들었던 나도 평소에 마시지 않던 커피를 주문한다. 나는 연유커피 샷은 한개만. 아이스크림이 나오기도 전에 우리 넷은 가게의 얼음물을 다 마셔버릴 정도로 너무 더운 날이었다. (우리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여름에도 물을 냉장고에 넣지 않고 마시는 집...)

더위가 가시고... 우리가 향한 곳은 김녕! 나와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바다로 아빠와 함께 가본다. 날이 좋기도 하고 멘도롱장이 열리는 날이라 주차장이 거의 만차다. 처음 왔을땐 열대도 없었는데. ㅎㅎㅎ

추위를 타서 물놀이를 좋아하지 않는 짝꿍은 일단 텐트를 지켰고, 나는 이렇게 습하고 더운날 하는게 물놀이지... 라고 생각하며 아이들과 물에 들어갔다. 바닷물이 찰랑찰랑 들어오는 모래사장에 앉아 첨벙거리다가 조금 추워져서 텐트로 돌아가서 바톤터치. 아빠와 아이들은 바위로 온갖 것들을 잡으러 떠나고 나는 아주 마음편히 누워서 쉰다. 아니 내가 이러려고 바다에 왔는데...

그동안 제주바다는 너무 추웠다. 제주의 이상기온 탓도 있었겠지만 가끔 있던 기온이 높은 날도 바람이 세서 너무 추웠다. 아이들은 아무리 길어야 세시간 놀았고 보통은 한시간반~2시간 정도 되면 둘째가 추워서 몸을 덜덜 떨어서 부랴부랴 집에 가야했다. 주차장에 세워서 찜통이 된 차에 타서는 셋이 모두 "아~ 너무 따뜻하다~"라면서 창문도 열지 않고 집까지 갔다.

그런데 이날은 물놀이를 위한 날 같았다. 바람이 없고 적당히 해가 나와서 물에 들어갔다가 추워지면 젖은 몸으로 밖에 나왔고 아무리 나와 있어도 춥지 않았다. 짝꿍은 미역던지기 놀이나 해양동물 채집 등 자신만의 놀이를 만들어 아이들과 놀았고 아이들도 오랜만에 바다에서 까르르 거리며 아빠와 놀았다. 지켜보던 내가 다 뿌듯하고 즐거웠다. 마음도 따뜻했다.

제주 내려온 첫째주부터 기다렸던 멘도롱장도 드.디.어. 구경했다. 제주에서만 입을 것 같은 원피스도 하나 사고, 보자마자 '아니 이건 원래 내껀가?' 싶었던 손뜨개 모자도 샀다. 둘째를 위한 예쁜 머리띠도 샀다. 군것질꺼리도 사먹었는데 소떡꼬치와 보말떡볶이, 한라봉쥬스를 먹었다. 물놀이도 하고 쇼핑도 하고... 두시 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한 우리는 여섯시가 되어서야 밥시간 때문에 정리했다. 물론 해수욕장 폐장 시간이기도 했고. ㅋㅋㅋㅋ

이렇게 흡족한 물놀이를 하고 싶었는데... 서울 갈 날 며칠 앞두고 하루라도 잘 놀아서 다행이네!

 

오름을 내려오고 있는 것 같은 이 사진은 사실 뒤로 걸어올라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카페에서 시원한 것들을 먹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더위먹었을 거다.
오늘도 어김없이 모래를 판다.
발이 많이 탔다. 이제야 사람 발 답네.
바닷물 뜨는 일 쯤은 이제 뭐 눈감고도...
바닷물에 파묻히는 중
아빠와 미역던지기 놀이

제주살이 스물다섯째날: 나에게 제주는

밤새 폭풍우가 몰아쳤고 아침에도 비는 계속됐다. 하지만 이젠 우리가 아는 그 '비'의 수준. 무얼할까 고민하다가 오늘 떠나는 친구와 '그래도 제주에 왔으니 바다는 가야지!'하며 함덕으로 향했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가는 길에 비가 완전히 그친다. 오호... 바람이 좀 불지만 오히려 바람 셌던 날들보다 괜찮았고 아이들은 모래놀이를 시작했다. 안나왔으면 어쩔뻔했어. 천만 다행이야!

바닷가에서 노는 애들을 바라보며 오후에 뭐할까 궁리하다가(어른 다섯, 애들 넷, 세 가정) 엄마들끼리 카페에 가기로 급결정. 점심을 먹고 우리는 카카오택시를 타고 월정리로 향했다. 선흘에서 월정리로 간게 이미 여러번인데... 내가 운전 안하니까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구름도 예쁘고 하늘도 예쁘고 나무도 예쁘다.

월정리에 도착해서 원래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cafe stay salty다.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ㅋㅋㅋ 근데 창가 자리는 만석이기도 했고 옆에도 모던하고 깔끔한 곳이 있어서 들어갔다. 바다뷰로 자리를 잡고 차와 케익을 먹고 있노라니... '아, 내가 이러려고 제주에 왔었지...' 싶었다. 이렇게 여유있게 바다보며 하염없이 아무생각 안하고 싶었는데, 나는 한달을 어떻게 지낸거지... 나를 돌아보게 된다.

지난 시간은 끊임없이 내가 어떤걸 좋아하고 어떤걸 싫어하는지 알게 하는 순간들이었다. 3주만에 짝꿍을 만났을 때도 이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게됐지만, 반대로 서울에서의 일상 중 어떤면을 싫어했었는지도 알게 됐다. (도착한지 이튿날 오전에 바로 깨달음) 아이들의 행동도 내가 싫어하는 포인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됐고, 나는 애들과 뭘 하며 놀 때 즐거운지 알게됐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알게됐으며 나에게 지나친 고요함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됐다. 내가 얼마나 계획적인 인간이며, 그걸 작게 어길 때는 기쁘지만 궤도를 벗어나는 것은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완벽한 동선에 물개박수치며 좋아하고 쓸모없는 움직임을 싫어한다. 낮이든 밤이든 일정시간 나만의 시간이 보장되어야 한다.

여러명이 방문한 날에도 그랬다. 누군가가 찾아오는게 반가운 일이긴 했지만 여러사람이 만족할만한 일정을 짜는게 나에겐 즐겁지 않았으며, 가족의 여행은 오롯이 우리만일때 더 좋았다. 하루종일 붙어있는건 부담스럽고 서로의 시간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이 좋다. 물론 나랑 함께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ㅋㅋㅋㅋ 아무튼 그와 나의 다른 점도 새삼 복습했다.

제주에서의 생활이 아직 며칠 남았지만... 제주에 다시 오고 싶은지 나에게 묻는다면 여전히 나는 다시 오고 싶다. 다음에 다시 오면 첫째주에 했던 아이들과의 시행착오를 안할거고 어떻게 살면 더 좋을지 알겠다. 물론 몸은 또 힘들겠지만 그래도 더 즐거울 방법을 알 것 같다. 

쉬려고 온 이곳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알게하는 그런 곳이다.
그런게 휴식의 이유인가...

밀크티도 맛있고 케익도 맛있고... 바다도 좋고.
비오는 월정리를 혼자 5분 정도 걸었는데 그렇게 좋더라.

(글을 다 완성했는데 크롬의 비정상적 종료. 티스토리는 임시저장된 내 글을 없애버렸다. 흥이 나지 않는 상태로 이 날의 기록을 시작한다.)

제목을 이렇게 쓰니 대단한 것 같지만... 본격 태풍 체험은 아니고 제주가 태풍영향권에 들어서 강풍과 폭우를 체험했다. 밤새 빗소리와 바람소리에 잠을 푹 자지 못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을 보니 정말 대단했다.

1박2일로 놀러온 둘째의 친구 가족이 있어서 차마 이날마저 집에만 있을 순 없었기에 일단 비오는 날 가려고 눈여겨둔 제주해양동물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 들어가는 길목부터 아기자기하게 꾸며둔 것이 마음에 들었고 들어가자마자 우리를 맞이해준 개복치가 있어 더욱 매력적이었다. 이미 죽은 해양동물들로 박제를 만들었다는 이곳은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다. 특히 초등2학년인 첫째는 탐구자의 자세로 박물관을 살폈다. 그런데... 나도 좀 신났다. 개복치가 그렇게 큰지 몰랐고, 상어의 종류마다 이빨이 다르게 생긴것도 몰랐으며, 거북이 등딱지의 촉감이 그렇게 좋은지 몰랐다. 입장할때 어린이들에겐 워크시트도 주는데 컬러링과 스탬프찍기 등 도구도 잘 준비되어 있어서 좋았다. 흡족한 마무리까지 있는 곳.

그렇게 박물관을 나서려는데... 비가 하늘에서 콸콸 쏟아진다. 빗발이 약해지길 기다려야 하나...를 고민하다 내린 우리의 결론은 '태풍인데 잦아들리 없다. 가자.'였다. 우산을 썼지만 차 문을 열고 우산을 접고 타는사이 홀딱 젖게 되는 상황. 차에 탔는데 모두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하하하.... 아이들과 나는 서로 누가 더 젖었는지 징징대며 배틀을 하다가 '비는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거야'라는 자연의 힘을 깨달으며 훈훈하게(?) 마무리.

그런데 비가 정말 심상치 않다. 아니 '물'이 심상치 않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하늘에선 계속 콸콸 쏟아졌고 도로에도 물이 콸콸 흘렀다. 도로인지 냇물인지 모를 지경. 차가 달리는지 떠내려가는지 분간이 어렵고 그런 장면을 보며 차속에 앉아있노라니 홍수에 차가 떠내려가고 돼지가 떠내려가는 것이 지금 바로 우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은 짝꿍이 하는데도 내 손은 꽉 쥐어지고 다리엔 힘이 들어가서 어깨가 결려오는데 내릴때까지 몰랐다. 엄마아빠는 잔뜩 긴장하며 그렇게 비오는 제주도 중산간도로를 달리는데 아이들은 해맑고 신기하다고 한다. 그래... 너희라도 즐거우렴. 근데 진짜 무서웠어.

겨우 달려(기어?) 도착했는데... 그 다음이 더 신기했다. 비가 잦아들자 시냇물같고 연못같았던 그 도로들이 산뜻뽀송하다. 아니 이것이 현무암 섬의 배수 클라스인가... 이래서 제주도는 홍수가 없단 것인가... 서울같았으면 역류다 뭐다 난리난리 물난리가 났을텐데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지.

저녁에도 비는 계속 쏟아지다 잦아들다를 반복했지만 바람만은 더 강해졌다. 집 현관문을 열면 바람에 문이 날아가듯 열렸고, 차 문을 열면 닫기가 힘들었다. 육지에서 한줄로 접하던 '제주도 태풍영향권'이 이런 것이구나. 섬의 강풍과 호우는 이런 것이구나. 섬 사람들은 이런 일을 그냥 일상으로 살아가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진짜 태풍이 강타하면 얼마나 대단하고 무서울까...

비행기는 오후 5시경부터 무더기로 결항됐다. 저녁에 올라가기로 한 둘째의 친구는 발이 묶였고, 토요일 비행기표는 귀경길 기차표처럼 눈에 보이던 표들이 빛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그래서 결국 저녁 8시 표를 구했고 정확히 23시간 일정이 미뤄졌다. 친구와 더 놀 수 있는 어린이들은 기뻤다.

입구에 있던 시. 마음에 들어 기록으로 남긴다.
탐구하는 어린이들

짝꿍이 집에 오고 맞은 아침. 뭔가 다를 줄 알았지만 전혀 다르지 않았고 우리집 아이들은 여느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스스로 놀거리들을 찾아 놀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빠가 일어나자 침대에 다닥다닥 따개비처럼 달라붙어있었다는 것. 다행이다... 나한테 다닥다닥 붙어있는게 아니라서. ㅋㅋㅋㅋ

오후에 어린이집 친구 가족이 온다고 해서 오전에 뭘 할까 궁리하다가...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오기 시작해서 만장굴에 가기로 했다. 우리는 굴=실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바로 아주 큰 오판이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는데 굴 내부에 물이 떨어지고 기온이 추우니 조심해서 둘러보라는 안내를 한다. 굴 입구로 들어서는데 굴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복장이 대부분 비옷을 입었거나 우산을 썼다. 왜지...??

들어가보니 정말 추웠다. 밖은 25도인데 안은 11~15도였다. 굴 내부는 비가 주룩주룩 오고 있었다. 여기가 화산섬이고, 이 동굴은 화산 동굴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제주도에 홍수가 없는 것도 놀라운 배수능력 때문인데 왜 그런 생각은 못했을까... 십여년전 만장굴에 왔을 때는 맑은 날이어서 그냥 축축한 정도였다고 기억했는데 지구과학을 더 공부했어야 한다. 우리는 비옷은 당연히 없었고 반팔에 반바지로 굴로 들어가 덜덜 떨어야 했다. 춥고 비오는 굴을 들어갔다 오느라 고생은 했지만 제주도 도착했을 때부터 동굴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첫째는 내내 즐겁고 신나있었다. 나오는 길에 물 웅덩이를 밟아서 기분이 좀 상하긴 했지만 동굴 내부의 용암흔적들을 보며 아주 만족했다. 그래, 누구라도 만족했으면 된거지. 암튼 이 춥고 고생한 것을 꼭 기록으로 남겨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야 다음에(아마도 10년? ㅋㅋㅋ) 만장굴에 또 가게되면 비옷을 입거나 외투를 입거나 준비를 하겠지. 분명 생각나지 않을테니까. ㅠㅠ

집으로 돌아와 옆 숙소에 묵을 다른 가족을 기다렸다. 내내 비가 올 기세여서 어딜 놀러나가진 못하겠고. 낯선 친구들과 3주 동안 이곳에서 놀던 아이들은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나자 무척 기뻐했다. 특히 단짝친구가 놀러온 둘째는 서로 꼭 껴안았다. 비오는 김에 물총놀이를 시작해 한바탕 놀았다.

우리가 이곳에 온 첫날이 기억났다. 그날도 비가 왔고 비오는데 노는 다른 아이들을 보며 첫째가 흥분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지. "엄마, 나도 놀아도 돼?" 이 곳은 도시 아이들에게 그런 해방감을 주는 곳이다. 비가 오면 집에만 있거나 실내에 있는게 아니라 비=물총놀이인 곳. 아이들은 몸이 좀 추워질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놀았다.

그리고 밤이 되어 대망의 봉숭아 물들이기. 어제 비오기 전 미리 따두었던 봉숭아꽃과 잎을 서울에서 가져온 다이소 절구에 콩콩 찧고 이번엔 소금이 아닌 명반을 넣어 봉숭아물을 준비했다. 어린이들이 무려 네명이어서 사십개의 손가락... ㅎㄷㄷ... 어른이 여럿 달라붙으면 좀 나으려나 했는데 역시 콩알만한 사십개의 손톱을 물들이는 건 한시간 쯤 걸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요 녀석들 모두 예쁘게 물들면 뿌듯하겠지!

맨날 큰오빠들에게 밀려 못올라왔던 고지를 점령
예쁜 손톱을 기대하는 올망졸망한 뒷통수들

 

짝꿍이 오는 날이다. 저녁에 도착하는 비행기라서 하루종일 집 근처에서 놀다가 저녁에 데리러 갈까, 제주시내에 나가서 놀까 고민하다가 제주시내로 정했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실내에서 할 수 있는걸 찾던 중 옛 대통령 제주공관을 이용해 만들었다던 '제주꿈바당어린이도서관'에 가는 것으로 큰 일정을 잡는다.

세부일정은 아침나절 적절한 게으름을 부리다가 점심먹고 선흘분교 근처에서 봉숭아도 따야하고, 시내에 나가 도서관에서 놀다가 머리에 실도 감아야 한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한살림에서 시리얼과 된장국 등을 사서 공항에 가면 아주 적절한 8시30분 도착 계획. 갈 곳들의 서로의 소요시간을 검색해서 순서대로 잘 배치했다.

꿈바당어린이도서관은 출입문부터 청와대스러웠다. 대통령 공관이었으니까... 들어서마자 이 터의 역사를 알려주는 돌이 나오는데 84년에 전두환이 착공한 건물이란다. 햐... 이것 봐라... 뭘 얼마나 해쳐먹으려고 제주에 집을 지어? 이용 횟수는 전두환 2회, 노태우 5회, 김영삼 4회. 그 이후에는 도지사 관사로 쓰이다가 게스트하우스를 거쳐 지금의 형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시설은 참 좋았다. 전체가 산책하기에 좋게 꾸며져 있었고 건물 안도 청와대스러운 마감이 되어 있다. 책의 배치나 청결도도 아주 좋았고 무엇보다 흥미진진 팝업북이 많았다. 물론 팝업북의 특성상 훼손이 꽤 되어 있었지만 색감이 좋은 외국 팝업북을 펼쳐보는건 참 재밌는 일이다. 

이후 계획된 일정은 아주 착착 진행됐고 저녁밥으로는 간짜장이 유명한 유일반점으로 낙찰. 주문이 밀려 20분 정도 기다려서 먹었는데 용산 신성각과 비슷한 맛이었다. 달지않고 담백한 짜장의 맛. 그리고 면도 아주 보들보들하고 쫄깃한 면. 군만두에 짬뽕까지 시켜서 깔끔하게(?) 마무리.

그런데 음식의 맛과 별개로 큰 깨달음이 있었다. 그간 나는 아이들과 식당에 가는 일이 힘들거나 어렵지 않았다. 그건 우리 아이들이 잘 기다려주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떠들었기 때문이다. 혹은 주위를 분산시킬 무언가를 찾아 적절히 해소시켜줬다. 그런데... 비오는 날 제주의 현지 인기 중국집에 앉아 생짜로 20분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이건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애들은 좀이 쑤셨고 떠들었고 나는 그들을 말릴 에너지가 없었다. (4시 무렵 부터 비가 와서 시내 길도 막히고 운전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너희들... 옥토넛 탐험대 볼래?"라고 물었고 스마트폰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15분 가량 평화가 찾아왔다. 아... 영상물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은 이런 것이로구나... 나는 왜 3주간 그렇게 고생을 했던가... 그동안 엄마말을 비교적 잘 들어주어 고맙다 얘들아.

진짜 고난(?)은 사실 식사를 하던 중간에 일어났다. 김포에서 비행기 출발지연. 헐... 내가 오늘 어떻게 짠 동선이고 어떻게 맞춘 시간인데 지금 장난하나... 집으로 돌아가서 쉬면 30분 정도 쉬었나 나올 수 있는데 집에 갈까 열번쯤 고민했지만 비오는 밤이었다. 아... 그냥 공항으로 가자... 공항에 도착한 시간 정확히 8시 30분. 이런 망할 대한항공... 완벽한 동선이 너 때문에 무의미해졌다고!!!!!!!!!!!!!!!!

아무튼 공항에서 1시간 10분을 더 기다려서 이산가족 상봉. 3주만에 만나는 당신 반가워!

청와대스러운 대문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정치적 중립 서가
진짜 배가 튀어나오는 느낌!
"아빠 발 보여?" "아빠 대체 언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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