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키우며 '내가 어른이 되었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이젠 내가 산타'라는 사실이다.

이제 더이상 나를 위한 산타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누군가의 산타가 되어줘야 하는 것.

그런데 올해는 그게 진짜 어른이라는 걸 깊게 실감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둘째 녀석은 '아기'에 불과해서 '선물'이란게 뭔지도 몰라서  받아도 그만 안받아도 그만이었다.

그리고 첫째 녀석은 엄마의 유도심문(?)에 넘어가서 필요해서 사려고 했던 것 혹은 엄마가 평소에 사주고 싶었던 것을 선물로 받고싶어했다.


하지만 올해는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간 우리집 첫째가 받고 싶다고 했던 수많은 선물 리스트 중 기억나는 것만 나열해 본다.

(정말이지 한달동안 매일 다른 품목을 얘기함)

- 사람 몸에 닿기만 해도 그 사람은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마법지팡이 (호그와트냐)

- 광산 (광산으로 이사를 사야하나)

- 광산에서 캔 금은보화

- 해치 뿔로 만든 요술지팡이 (호그와트 가야겠네)

- 우주로 갈 수 있는 로케트 (우리집 NASA)

- 온 세상 모든 걸 벨 수 있는 큰 칼 (무섭게 이런걸 왜)

- 뭐든지 할 수 있는 시리즈 (뭐든지 뚫는 창 등등)


뭐 이런 것들...

듣다 듣다 기가차서 "산타할아버지도 세상에 존재하는 물건만 선물로 주실 수 있어"했더니 "산타할아버지는 이런거쯤은 다 만들어~"라며 자신있어한다.

열심히 설득해보았으나 최종 선택지는 크리스마스 전전날 정해졌는데 '광산에서 캔 다이아몬드' -_-

결혼반지에서 빼줘야 하나... 싶은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그럴순 없었고... 아무튼 최선을 다하기 위해 플라스틱으로 된 보석 모양을 사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12월 23일에 무려 반차를 내고 코엑스몰을 뒤졌다.

인테리어 소품파는 무지, 자라홈, 코즈니 등을 뒤졌지만 실패.

12월 24일 애들 낮잠시간을 이용해 혼자 아이파크몰을 갔다.

주차하는데 한시간...(우리집에서 걸어가도 20분이면 가는 곳을 이게 무슨 개삽질...)

그래도 인내를 가지고 5~6층 인테리어 관련 매장을 또 샅샅이 뒤졌다.

없다.................


결국 둘째가 (엄마의 계략에 의해) 받고 싶은 컵을 두 개 사가지고 귀가.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도, 집에 와서도 남편과 나는 머리를 싸맸다.

'산타가 내가 원하는 선물을 주지 않았다'며 실망할까봐 전전긍긍.


집에 있는 수경재배용 플라스틱 투명 돌멩이를 둘이 열심히 닦았다.

그리고 식물을 키우려고 고이 간직한 예쁜 유리병도 꺼냈다.

그런데 우리 지안이가 어떤 아이인가... 관찰력의 왕, 기억력의 왕.

이게 우리집 어딘가에 있었던 물건이라는 걸 눈치챌 것 같았다.

알아채면 또 이걸 어쩌나 우리부부는 다시 전전긍긍.


새벽1시 아이들의 머리맡에 놓을 선물을 준비하고 카드를 쓰면서 깨달았다.

내가 누군가의 선물을 준비하며 이렇게 정성을 들여본 적이 있던가.

값비싼 것을 주기 위해 하는 노력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는 노력.


진짜 크리스마스 선물은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받은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준비하는 것이 이렇게 기쁜일이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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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12/3) 촛불집회 참가자 수는 200만이었다고 한다.

매주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엄마집에 갔다가 나오는게 늦어져서 (이날 나는 집회장소와 집과의 거리가 집회 참여동기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음) 10시 조금 넘어 시청역에 내려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다.

10시가 넘은 시각이라 본대회는 이미 종료.

아주 편하게 - 처음으로 - 사람다운 거리를 유지하며 광화문 광장을 지나 청와대쪽으로 향했다.

차벽 한 번 보고 올 요량으로.


광화문 사거리, 광화문, 영추문을 지나 저 멀리 차벽의 끝이 보인다.

그동안 맨날 사람에 치여 만나길 포기했던 차벽이 반갑기까지 하다.

그런데... 막상 차벽 앞 열걸음 정도까지 다가가자 나는 긴장했다.

정확히는 내 몸이 긴장했다는 것을 내가 알아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차벽 근처에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 소리도 지르고 구경도 하고 다시 돌아가는 시민들.

해맑고 즐거워 보이는 그 사람들은 나랑 뭐가 다르지?


아, 저 차벽이 물대포를 쏘는 바로 그 장비라는 것을... 모르는 것의 차이인가?

물대포를 맞아보거나 눈앞에서 보지 못한 것의 차이인가?

아무튼 나는... 금방이라도 물을 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이다.


이상야릇한 마음을 안고 뒤돌아 오는데 경찰에서 해산 방송을 한다.

그런데... 20년 가까이 데모하며 그렇게 다정한 해산 방송은 처음 본다.

내용은 다르지 않았다.

"시민 여러분. 신고된 집회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런데 내가 듣던 말투는 강하고 명령조의, 빈정거리거나 협박하는 말투였는데... 이 날 내가 들은 말투는 애인인 줄... -_-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남편과 나는 깔깔 웃으며 경복궁 길을 돌아서 나왔다.


경찰이 무섭지 않은 200만의 시민들.

이것은 평화집회의 힘인가, 쪽수의 힘인가, (경찰에 맞아본 적 없는)경험의 부재인가.

매주 집회에 참가할 수록 의문은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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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150만 집회에 다녀왔다.

처음 100만이 모였다고 할 때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곳(이라고 하기엔 넓지만)에 모인 것이 신기하기만 했고 그저 신이 났다.

그런데 150만이 모인 집회에서는 마음이 달랐다.


시청역에 내려 계단을 올라가는데 온통 가족들이었다.

중학생 쯤 되어보이는 자녀들의 손을 잡고 온 부모들...

눈시울이 뜨거웠다.

토요일 저녁 가족들이 도란도란 모여 밥을 먹고 있어야 할 시간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프레스센터 앞까지 가는데 한참이 걸렸다.

프레스센터 앞마당을 보니 언론조노 깃발이 보인다.

그래, 내가 저런 조직에 있었지... 괜히 실실 웃으며 광장으로 향했다.


'아침이슬' 노래가 들린다.

'누군가 만든 영상을 보고 있나 보군'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데 광장의 분위기가 다르다.

전광판이 보이는 곳으로 갔다.

이럴수가, 양희은이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

훌쩍,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음원으로만 함께 부르던 노래를 진짜 사람이 부르고 있다니.


너무 많은 사람에 지쳐갈 때 쯤... 행진이 시작됐다.

광화문사거리-종각-안국동-경복궁 쪽으로 걸어갔는데... 종각역을 지날 때 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2008년에도 참 세상 달라졌다고 느꼈는데, 이건 정말 뭔가 싶었다.

집회에서 소녀시대 노래도 나오고,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도 나왔다.

신기하다. 이게 뭐지.


집회 때 마다 전경 앞에서 후덜덜하고 1001, 1002, 1003을 만나면 쫄던 시절도 생각났다.

워낙 달리기가 느려 동뜨는 집회 때마다 긴장하고, 뛰다뛰다 안되면 '지나가던 시민' 코스프레하던 것도 생각났다.

(그 중 가장 힘들었던 건 부시 방한 반대 투쟁... 2001년인지 2002년인지 겨울... 동대문까지 뛰어갔네.)

글 쓰다보니 99년 학교 정문앞에서 날아오던 돌을 봤던 기억도 떠오른다. (이때는 정말 그냥 지나가던 학생시절...)

언론노조 있던 시절에도 우리가 금속처럼 피터지게 싸우고 옥쇄투쟁하는 곳은 아니었기에 언론스럽게 문화제하고 집회하고 그렇게 살았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들었던 생각.

그래봐야 내가 데모했던 건 2000대로 접어들어서 였으니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물론 대추리에서 야밤 담벼락에 쪼그리고 숨었던 살벌했던 기억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꽃병도 파이도 모르는 세대다.

80년대 가투했던 선배들을 생각하면 명함은 커녕 이름 꺼내기도 민망하다.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이렇게 도로를 걷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런데... 이런 세상은 정말 우리가 조금씩 싸워서 얻어낸 세상일까?

투쟁했던 선배들, 그리고 우리세대가 만들어낸 것일까?


주변의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그래서 이제 누가 대통령 하는거야? 앞으로 어떻게 되는거야?

운동권 저 변두리에서도 잔챙이, 잠깐 발 담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나는 모르겠다.


누구의 프레임대로 가고 있다느니, 지금 저들은 뒤에서 거래를 한다느니, 100만명은 휘둘리고 있다느니 참 말 많다.

민중에게 답이 있다? 그것도 나는 모른다.


되게 상투적인 표현인데 격변의 시대.

모두들 처음 겪는 이 시대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만큼이나 도무지 모르겠는 글이 되어 버렸다.

내 마음 같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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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초에... 운전면허증 적성검사기간 만료를 코앞에 두고 부랴부랴 건강검진을 받았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실시하는 기초적이기 이를데 없는 그 검진. 
그런데 경력단절 관계로 그 기초검진조차 6년만에 받았다. 

그 검진의 특징은 다들 알다시피 학창시절 신체검사의 느낌이어서 너도나도 다 정상인 결과를 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의사가 흉부엑스레이에서 폐 쪽에 결절이 보인다며 CT를 권했다. 
"분명히 아무 이상 없을 가능성이 95%인데요 그래도 이럴 경우 진찰을 받아보시길 권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게 지금 뭐래는건지...

돈을 주고 건강함을 확인하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세브란스에 진료예약을 하고 뒹굴거리던 어느날 저녁. 
사람인지라 걱정이라는게 시작됐고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였다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사실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돈을 주고 건강함을 확인해야하는 이유가 더욱 생긴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내가 싫어하는(가족 중 큰 병 앓아본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싫어하는) 종합병원의 지난한 과정 수납-대기-수납-대기-촬영-대기-문진-대기-진료의 과정을 거쳐 돈을 주고 건강함을 확인했다. 
걱정할 상태가 전혀 아니며 흔한 증상이지만 추적관찰 하자는 아주 평범한 진단을 받고 6개월 후 다시 이 지난한 과정을 반복하러 와야한다. 

그래서 결론은 건강하다. 
종합병원에서 대기하느라 소모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우롱밀크티와 크로아상을 먹어야겠다. 



위의 글을 쓸 때만 해도 내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으나, 병원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내가 차를 몇층에 주차했는지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어느 위치에 주차했는지는 기억이 나는데 (방향감각은 정상작동) 지하 3~6층 중 대체 몇층이었더라.
내차 위치 확인하는 시설이 되어있어 차 번호를 입력했는데 하필... 첫번째 주차했던 장소만 뜬다.
(본관에 주차했다가 너무 멀어서 진료받는 건물로 이동해서 다시 주차함)
차를 찾지 못할거라는 두려움 보다(지하 3~6층 어딘가 있겠지) 내가 차를 찾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고 무서웠다.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 자의 몸은 무의식의 세계에선 이미 내 것이 아닌가보다.
두 녀석들을 두고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나도 인지하지 못한 나의 마음이 꽤나 힘들고 긴장했던 모양이다.
이제 편히 쉬어보자...


운전면허증 갱신을 위해 오랜만에 증명사진을 새로 찍었다.


대학생 시절 찍었던 사진들을 생각해보면, 물론 보정은 하지만 그래도 원판 자체도 성의있게 찍어줬던 것 같다.

사진에 대해 잘 아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는 빛을 이용한 뽀샤시 효과였던 느낌.


작년에도 급하게 증명사진을 하나 찍었는데 이른바 '뽀샵'을 너무 많이 해서 누군지 모르겠는 지경인 사진이 완성됐다.

그래서 새롭게 찍으러 간건데 오늘 갔던 사진관은 무슨 자신감인지 보정과정을 바로 옆에 앉아서 볼 수 있게 했다.

'오호. 잘됐다. 뭘로 보정하는지 구경이나 하자'


그런데 포토샵이 한글버전이다.

'이런. 쪼렙인데.'


사실 사용한 툴은 뻔했다.

힐패치로 잡티를 겁나 없앤다.

그리고 리퀴드 툴로 윤곽선 보정, 눈 크기 보정, 코 보정, 이목구비 좌우대칭 보정.

그리고 클론 툴을 이용한 머리카락 채우기.

번 툴을 이용한 눈썹 다듬기, 입술 다듬기.

전체 피부톤 보정.


그런데 손의 속도가... 빛의 속도다.

단축키+마우스 조합이 프로게이머인줄.


아무튼... 그 사진관을 나오며 든 생각은...

포토그래퍼 한명 섭외해서 사진관을 차릴까...


증명사진은 더 이상 빛을 이용한 기술이 아닌듯 하여 씁쓸했다.

진짜 내 얼굴을 잘 나오게 찍어줄 곳은 어디인가...

(아... 비싼 곳은 가능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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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할머니는 솜이불을 좋아하셨다.
물론 옛날에야 목화솜밖에 없었으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화학솜이 많이 나오고 나서도 외할머니는 목화솜요, 목화솜이불을 좋아하셨다.

어릴적 외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시면 늘 하는 집안일이 있었는데, 이불 홑창을 다 뜯어 빨고 다시 꿰매놓는 것과 장독 뚜껑 열어놓기.
그러고보면 우리 엄마는 이 분야에선 부지런하진 않았던 것 같다. ㅋㅋㅋ

그 이불 홑창을 꿰매려면 목화솜과 홑창이 따로 놀지 않도록 잡아줘야 하는데 외할머니는 항상 나보고 이불 가운데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나는 신이 나서 가운데 앉아있다가 뒹굴다가, 이불에 수놓아져 있는 새가 진짜 99마리인지, 물고기가 정말 99마리인지를 세고 또 세었다.

외할머니집에 가도 할머니는 이불을 그렇게 뜯어서 빨고 꿰매셨다.
우리집에서와 다른 것은, 외가집에선 이불 홑창에 빳빳하게 풀도 먹였다는 것.

늘 빳빳하고 햇볕냄새가 나는 이불을 깔고 덮을 수 있어서 외갓집에 가는게 나는 엄청 좋았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평소 혈압이 높으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젊은 나이에 쓰러지신거다.

신여성으로 늘 양장투피스를 즐겨입고 유치원에 할머니 초청하는 날에도 신식 구두를 신고 파마머리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오시던 우리 멋쟁이 할머니는 그 이후 거동이 불편해지고 밥도 늘 흘리고 먹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더이상 풀먹인 이불도 만날 수 없었다.


그런 우리 외할머니의 이불이... 약 7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엄마를 거쳐 우리집에 왔다.

우리 애들도 깔고, 손님도 깔고 자던 목화솜요.


오래되어 솜을 틀어 새 이불처럼 깔려고 솜틀집을 찾고 또 찾았다.

인터넷에 많은 업체들이 있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외할머니의 소중한 이불을 아무데나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미연언니가 명랑솜틀집을 알려줬다.

네이버, 구글을 검색해도 후기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블로그를 하는 요즘 세대들은 솜이불을 쓰지 않고, 솜도 틀지 않는다.

그래도 오래된 동네의 솜틀집이고 공장에 보내는 방식이 아니라는 주인아저씨의 말에 가져가려고 한다.


그 이불을 보내려고 주말에 요 커버를 뜯는데...

커버가 겉돌지 않게 한땀한땀 꿰매놓은 외할머니의 솜씨가 보였다.

첫 실을 뜯는데 망설였다.

이걸 뜯어야 하나...

뜯고 또 뜯는데...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이불이 겉돌지 않을 정도의 실밥.

그리고 외할머니가 즐겨하던 +모양의 중간중간 실매듭.

이불 가운데서 뒹굴던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기억났다.


실을 뜯다 주책맞게 눈물을 글썽거리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와 깔깔 웃으며 외할머니의 꼼꼼함과 엄마가 지겨워할만큼의 깔끔함에 대해 흉을 봤다.

엄마도, 나도 안다.

우리가 얼마나 서로의 엄마와 외할머니를 그리워 하는지.


우리 엄마는 나중에 죽으면 우리 애들에게 어떤 것으로 기억될까.

우리 애들은 무엇을 추억삼아 외할머니를 떠올릴까.


우리 외할머니가 무척 보고 싶다.






라은이는 외모는 나를 닮았지만 성격은 남편을 닮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고 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센 라은이를 보고 나를 닮았다고 하는데, 나의 그런 성격은 후천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굉장히 다른 사람의 의견에 맞추고, 불편해도 참고, 이래도 저래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상대방이 편한게 내가 편한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불편하고 싫지만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맞다고 생각하면 싫어도 참는.

지안이의 성격이 나를 닮았다.

(조직의 논리로 나를 누를 때 상당히 많은 경우 나는 수긍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같은 일인데.)


아무튼,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둥근외모에 둥근성격으로 살다보니 '바보같다'는 소리를 듣는 일도 있었고 관계에서도 자꾸 치였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일이 많았던 가정사에 나는 더이상 둥근 성격을 가질 수 없었다.


사춘기 이후 나는 내 주장을 강하게 하고, 겉으로도 강해보이는 말투와 행동을 일부러 했던 것 같다.

그래야 무시당하지 않고, 손해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아무튼 그 이후에 대학에 입학해서도 계속 나는 모나게 살아왔다.
그게 내가 나를 방어하고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어느새 나는 그런 성격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5년간 육아에 집중하면서 원래의 기질과 후천적 성격 사이에 내가 있게 됐다.
그래서 나는 순간순간 고민한다.
어떤 마음이 진짜 나의 것인가.
어떤 판단이 진짜 내 생각인가.

서른이 훌쩍 넘어 마흔이 더 가까운 나이에 뒤늦게 자아성찰을 하고 있는건...
오늘이 일요일 밤(혹은 월요일 새벽)이어서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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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도 달라진다."


정말 오랜만에 본방사수 중인 드라마 '송곳'

드라마고 예능이고 본방송을 챙겨보는게 2년만인가, 3년만인가.


요즘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엔 송곳이 많이 등장한다.

그것도 나처럼 열혈 시청자들.

게다가 '구고신'의 실제모델로 알려진 하종강 소장님도 계시고.


그런데 의외로 오프라인 주변엔 송곳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리고 그걸 어젯밤 남편씨도 느꼈다고.

어린이집 대청소에서 아빠들이랑 얘기를 했더니 응8은 다들 봤는데 송곳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유를 토요일 방송, 5회를 보면서 깨달았었다.

노조를 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지, 그렇게 꾸린 노조 안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의견대립이 있는지, 그래서 결국 싸우면 대차게 깨지는지, 그래서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남고 상처투성이인 모습들.

노조를 한다는 것,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것은 일하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권리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지지리 궁상이거나 무식한 것들 이거나 뭐 이런 취급들.

몸싸움, 피켓팅, 유인물, 노조조끼 이런 모든 것이 나는 너무 익숙한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얼마나 공감을 할 수 있을까.


금속연맹 가입서에 금속 로고가 박힌 디테일에 혼자 빵 터지고, 농성 천막에 장구에 실실 쪼개고, 구고신 소장 강의를 들으며 하종강 선생님을 떠올리는... 나는 추억할 것도 공감할 것도 너무 많은 이 드라마가.

내 주변 안정적인 수입을 가지고 어느정도의 생활수준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생경한 얘기일 것이다.

특히나 공동육아를 하고 있는 부모들 대다수의 면면이... 정치적 성향은 진보일 수 있으나(물론 보수도 있...) 노조 언저리엔 가보지도 않았을 거고 본인이 마트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안해봤을 것이다.


문든 내가 서있는 곳은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푸르미 마트 언니들의 위치에 서있는지, 아니면 도시의 어느 중산층 무리에 서있는지.


내 주변에 고학력자가 넘쳐난다.

대기업 노동자(대기업과 노동자는 왜이리 안어울리는 단어란 말이냐...)도 넘쳐나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실제 내 주변에 이제 학사보다 석사 이상이 더 많다.

아니면 전문직이거나.

나는 겨우 4년제 대학을 참으로 낮은 학점으로 나와서 언제든 더 낮은 임금의 일자리로 갈 가능성이 있는 노조 상근자 경력인 사람이고.


내가 서있는 곳을 내 주변 사람들이 서있는 곳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자리를 잘못잡고 서있는 건 아닌지.


이 불편하고 껄끄럽고 구질한 감정들은 뭐지.

오랜만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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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우리집은 큰집이었다.
일년에 제사도 수두룩 했고 명절엔 내내 북적북적하고 일이 많았다.
그래서 차례음식 만드는게 나에겐 그리 힘든 일도 낯선 일도 아니었다.
국민학교 시절엔 시골 할머니집 간다는 친구들이 참 부럽기도 했었다.
시골집이라니... 낭만적이기도 하여라...

결혼하고 나선 시댁이 시장에서 과일가게를 하다보니 명절 첫날이 대목이다.
그래서 내일은 남편에겐 새벽부터 밤까지 약 15시간의 노동이 기다리는 날이다.
며느리들은 집에서 애들과 음식을 해야하고.

암튼 평생 명절에 시골은 커녕 다른집에 가본 적이 없다.
기차표를 끊었든 실패했든 지방으로 내려가는 사람들 보다야 '명절전야'의 느낌은 덜 나겠지만 그래도 명절전야는 전야다.
명절연휴동안 하지못할 것을 대비해 세탁기를 쉴틈 없이 돌리고, 냉장고에 상할 음식들을 처리하고, 청소를 해두고 있다.

그냥.
왠지 스산하고 비장한 느낌은... 보름달 때문이겠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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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자꾸 선택할 일이 생긴다.
물론 아직 선택하지 않은 일도 있고, 이미 선택한 일도 있지만 삶의 대부분은 선택을 위한 고민으로 채워진다.

오늘 집에 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른으로 사는건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오롯이 지는 것이라고.

요새 고민되는 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 부터 큰 것 까지 다양하다.
몇가지 들여다보면...

나날이 오르는 전세에 용산바닥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경기도로 가는 것은 일단 객관적인 상황들 때문에 보류. 아... 나의 로망 마당딸린 집 ㅠㅠ)
지안이 초등학교는 공교육으로 갈 것인가 대안학교로 갈 것인가.
나는 뭘로 돈벌이를 할 것인가.
궁긍적인 자아실현은 뭘로 하고싶은가.
올해 휴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온전히 다 내가 선택해야 하는 일이며 책임도 내가 진다.
그래서 어렵고 때로는 외롭기도 하고.
그나마 인생을 함께 살아주는 사람과 의논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마는...
그래도 결국 내 인생이지.
오늘도 선택을 위해 열심히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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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달째 하고 있는 잡지 기자 일은 분명 매력이 있는 일이다.
기사 쓰기 힘드네, 어투가 입에(손에?) 붙질 않네, 지면 기획하기 힘드네 어쩌네 해도...
뭔가를 기획하고 쓰고 완성해서 결과물이 나오는 일은 재밌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런데 일하며 한계도 자주 느낀다.
그건 어쩌면 이 일에 늦게 들어선 건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남들은 20대에 시작해 10년을 굴렀을 바닥에서 다른 업계에서 날아와 10년의 간극을 따라잡을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글이야 쓸 수록 늘고 점점 톤도 맞춰져가고 있지만... 그래도 영영 이렇게 언저리를 맴돌다 사라져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비슷한 그런 감정.

5년의 공백과, 시간을 내 마음대로 온전히 쓸 수 없는 아이 엄마로서의 내 처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다.
5년전 나의 바닥에서 구르며 쌓았던 경험들이 이제는 뒤떨어진 것이거나, 그 업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하등 쓸모없는 것이란 생각이 자꾸만 든다.
(일면 맞고 일면 틀린 생각이라는걸 알지만... 자신감이 떨어지는 시기인가보다.)

지나간 결정, 지나간 선택에 대해 나는 후회를 잘 하지 않는다.
실제로 깊이 고민해서 결정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후회하지 않으려고 늘 자기 합리화를 잘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객관적 조건에 동동거리며 쫓기는 내 모습을 볼 때면 과거의 나의 선택들이 모두 최선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어쨌건 나는 지난주와 이번주에 걸쳐 내 인생에 중요할지도 모르는 결정 하나를 했다.
잡지사를 관둔다.
그리고 다른 일을 시작한다.
평범한(?) 사무직이고 사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회계와 관련된 업무여서 걱정도 된다.

이 일이 나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성취감도 주지 않을 수 있단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고민끝에 결정한 것은 애초 나의 목표로 가기 위해선 이 선택이 나을 것 같아서다.
잡지에 뛰어드려고, 기자질 다시 하려고 했던게 아니니까.

5년전 언론노조를 그만둘 때도 사실... '평생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 발전 없이 하루하루 버티며 조직에서 소모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나 아니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5년이 지나고 다른 일을 하는데도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면 그런 두려움을 떨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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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할 기간이 얼마가 될 지 모르는 일을 내일부터 시작하게 됐다. 

허울 좋은 프리랜서란 개념은 실적이 별로이거나 사업자체가 엎어지면 언제든 백수로 돌아갈 수 있다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년이라는 긴 세월의 벽을 깨고 나서려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리스크를 안고 가지만 그 또한 내 운명이려니 하며 가보는 수 밖에. 


아까 낮에... 내일 있을 미팅 준비를 하느라 맥북을 열고 이것저것 정리를 하다가...

내 삶의 대부분이 어린이집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알고는 있었는데 눈에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니 기분이 묘했다. 

(각종 폴더 구성 및 즐겨찾기 리스트들...)

딱 열면 조합관련 페이지와 문서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세팅을 바꾸고 있노라니... 슬며시 모드전환 되는 내가 보였고 분명 내 모습인데 참 낯설었다. 

근데 한편으론 두려웠다.
업무로 모드전환 하는 것 만큼 내 사람들과도 모드전환이 될까봐.
얼마만에 느껴보는 감정인가, 내 사람들.
돈과도 바꾸지 않은... 구질하고 질척한 관계들이 이어지는 사람들.

다른 쪽으로도… 너무 오랜만에 역할을 바꾸려니 쉽게 되질 않는다.
지긋지긋했던 엄마노릇 주부노릇을 막상 놓으려니 아쉽다.
너무 긴 시간 엄마로 아내로만 살았더니 마치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이 이 일이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든다.

암튼 새로운 일을 시작할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서 맨몸으로 거리에 내쫓기는 기분이 든다.
아직 어린이집에 등원조차 하지 못한 라은이를 보낼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아 그 또한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어쨌든… 내일은 오겠지.
나가보자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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