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외할머니는 솜이불을 좋아하셨다.
물론 옛날에야 목화솜밖에 없었으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화학솜이 많이 나오고 나서도 외할머니는 목화솜요, 목화솜이불을 좋아하셨다.

어릴적 외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시면 늘 하는 집안일이 있었는데, 이불 홑창을 다 뜯어 빨고 다시 꿰매놓는 것과 장독 뚜껑 열어놓기.
그러고보면 우리 엄마는 이 분야에선 부지런하진 않았던 것 같다. ㅋㅋㅋ

그 이불 홑창을 꿰매려면 목화솜과 홑창이 따로 놀지 않도록 잡아줘야 하는데 외할머니는 항상 나보고 이불 가운데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나는 신이 나서 가운데 앉아있다가 뒹굴다가, 이불에 수놓아져 있는 새가 진짜 99마리인지, 물고기가 정말 99마리인지를 세고 또 세었다.

외할머니집에 가도 할머니는 이불을 그렇게 뜯어서 빨고 꿰매셨다.
우리집에서와 다른 것은, 외가집에선 이불 홑창에 빳빳하게 풀도 먹였다는 것.

늘 빳빳하고 햇볕냄새가 나는 이불을 깔고 덮을 수 있어서 외갓집에 가는게 나는 엄청 좋았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평소 혈압이 높으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젊은 나이에 쓰러지신거다.

신여성으로 늘 양장투피스를 즐겨입고 유치원에 할머니 초청하는 날에도 신식 구두를 신고 파마머리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오시던 우리 멋쟁이 할머니는 그 이후 거동이 불편해지고 밥도 늘 흘리고 먹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더이상 풀먹인 이불도 만날 수 없었다.


그런 우리 외할머니의 이불이... 약 7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엄마를 거쳐 우리집에 왔다.

우리 애들도 깔고, 손님도 깔고 자던 목화솜요.


오래되어 솜을 틀어 새 이불처럼 깔려고 솜틀집을 찾고 또 찾았다.

인터넷에 많은 업체들이 있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외할머니의 소중한 이불을 아무데나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미연언니가 명랑솜틀집을 알려줬다.

네이버, 구글을 검색해도 후기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블로그를 하는 요즘 세대들은 솜이불을 쓰지 않고, 솜도 틀지 않는다.

그래도 오래된 동네의 솜틀집이고 공장에 보내는 방식이 아니라는 주인아저씨의 말에 가져가려고 한다.


그 이불을 보내려고 주말에 요 커버를 뜯는데...

커버가 겉돌지 않게 한땀한땀 꿰매놓은 외할머니의 솜씨가 보였다.

첫 실을 뜯는데 망설였다.

이걸 뜯어야 하나...

뜯고 또 뜯는데...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이불이 겉돌지 않을 정도의 실밥.

그리고 외할머니가 즐겨하던 +모양의 중간중간 실매듭.

이불 가운데서 뒹굴던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기억났다.


실을 뜯다 주책맞게 눈물을 글썽거리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와 깔깔 웃으며 외할머니의 꼼꼼함과 엄마가 지겨워할만큼의 깔끔함에 대해 흉을 봤다.

엄마도, 나도 안다.

우리가 얼마나 서로의 엄마와 외할머니를 그리워 하는지.


우리 엄마는 나중에 죽으면 우리 애들에게 어떤 것으로 기억될까.

우리 애들은 무엇을 추억삼아 외할머니를 떠올릴까.


우리 외할머니가 무척 보고 싶다.






지난 토요일 아침이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남편씨에게 짜증을 냈다.
뭐랄까...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서였을까?
'니가 잘못들은 거겠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곧장 엄마한테 전화했더니...아침에 할아버지가 깨웠는데 안일어나셨단다...

외할머니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오른쪽 몸을 거의 못쓰시게 된게 22년 전이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때.

우리 할머니는 굉장히 멋쟁이셨다.
늘 양장 투피스에 구두를 즐겨신으셨고 백화점 쇼핑도 좋아하셨다.
어렸을때 기억에 어딜가도 '우리 할머니'라고 하기에 너무 자랑스러울 정도로 예쁘고 지적이고 멋있었다.

그리고 최고의 음식솜씨를 가지신 분이었다.
유치원때 엄마가 와서 같이 음식만드는 수업이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라고 했을때 손 안든 사람은 나 밖에 없어서 엄마가 너무 챙피해했었다.
난 당당하고 소신있게 "전 할머니가 해주는게 제일 맛있어요"라고 대답했다. ㅋㅋ

외할머니에게 나는 첫손주여서 가장 많이 사랑받았다.
항상 먹고 싶은게 뭔지 물어봐서 온갖 반찬을 보내주셨고 천안에만 가면 나는 호강했다.
그렇게 항상 '첫사랑'이라며 예뻐해주셨다.
할머니가 아프기 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손주는 두명 밖에 되지 않고 난 그 두명중 한명이다.
아픈 이후에는 애들을 예뻐해주시기가 어려웠으니까...

할머니가 아프고 나서도 항상 할머니를 만나면 난 어리광 피우고 애기짓을 했다.
심지어 결혼해서도 ㅋㅋ
할머니 한테 예쁜 애기 낳아서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실줄은 몰랐다.
비록 20여년간 모든 식구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가시다니...

아직도 할머니가 '아가~'하며 볼부비던 느낌이 생생하다.
난 아직도 할머니한테 부릴 어리광이 잔뜩 남았는데...

그래도 할무니...
이제 안아프고 편한데 가셨으니 좋지?
이제 다시는 아프지 말구 하고 싶은거 하고 그렇게 사세요...
할무니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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