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족들을 서울에 버리고 두고 제주로 여행 온 이유를 말해보려한다. 제주에서 난생 처음으로 “술을 제법 마신다”는 칭찬(!)을 듣고 맛있는 맥주를 마신, 여행의 둘째날 밤이자 마지막 밤인 지금이야말로 그 얘기를 하기에 적절한 때다.

고기지글지글 얘기를 친구와 하다가 고기먹으러 제주 가잔 말을 친구가 던졌고 나는 진심으로 받았다. 먹는거엔 늘 진심인 사람들이니까.

일상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안다. 내가 힘들어지고 있는 걸. 여러 시그널이 있을 수 있지만 이번엔 다른 이의 불평 혹은 비판 혹은 부정적 얘기가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나를 향한 얘기도 아니고, 그게 나를 향한 얘기로 들리는 것도 아니다. 그냥 누군가를(혹은 물건을) 향한 그 어떤 부정적 얘기도 듣기가 힘들어지는 날들이었다.

보통의 나(보통이란 무엇인가... 쓰고 보니 무엇이 보통인지 모르겠다),  평온한 마음의 나였더라면 ‘아 너는 지금 그때 화가 난 것을 표현하고 싶구나’, ‘아 당신은 지금 무척 애쓴 걸 인정받고 싶군요’ 이렇게 알아듣고 그에 맞는 반응을 했을텐데 요즈음의 나는 그냥 듣기가 싫고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복잡해지고 책임이 무거워지는 조직에서의 역할, 학년이 올라갈 수록 신경써야하는 것이 많아지는 엄마로서의 역할 모두 양은 많아지는데 완벽하고 싶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 나는 달라지지 않고... 나는 내 자아실현도 해야하는데 내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체력마저 모든게 나의 욕심인데 안내려놔진다. 뭐... 이번생은 글렀어.

제주에 내가 뭘 원해서 왔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그냥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인가, 나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가, 자연에 있고 싶었던 것인가... 이틀째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뭘 정말 좋아하는지 정확히 확인했는데 조용한 바닷가에서 캠핑의자에 앉아 책을 실컷 읽고 싶다. 다음엔 제주에 꼭 캠핑의자를 들고와야지. 차 없이 와서 바닷가에서 캔맥주 먹어야지. 소심한책방에서 책 더 많이 사야지.

내 비록 서울에 두고 왔지만 여행 다녀오라고 해준 가족들 고마워. 잘 놀고 오라고 공항철도역까지 데려다준 동거인 고마워, ‘잘 있어?’라고 물어봐주고 ‘엄마 잘 있어~’라고 말해준 우리 귀여운 딸 고마워, 엄마 대신 꼼꼼히 달팽이 돌봐주고 뭐했는지 자세히 말해준 우리 아들 고마워. 나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이 자라서 갈게. 너희들도 모두 한뼘씩 자라있길.🙂

그리고 무계획으로 온 나를 이끌어주고 지나치게 많이 먹이고(이틀 내내 하루종일 배부름...) 까다로운 나를 견뎌준 내 친구 고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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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온전한 하루.
제주를 떠나는 내일은 아침나절 내내 한달 동안 살았던 집을 정리하는 날일테니 아마도 정신이 없겠지. 그렇다면 제주에서의 마지막 온전한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가 못한 것들을 몰아서 해볼까? 하지만 좀 더 차분하게 그간 우리가 했던 것 중 또 하고 싶었던 것을을 떠올려보며 한 번 더 가볼 곳을 두개 정도 고르면 어떨까? 이 정도로만 고민하고 아침밥 먹는 애들과 얘기를 나눴다. 너희는 어떤게 좋겠어?

"좋았던 걸 또 하는게 좋겠어!"

그렇다면 우리가 좋았던 것은 뭐가 있을까. 박물관도 갔었고 바다에도 갔고, 절물휴양림, 만장굴, 선흘분교, 오름도 갔었는데 각자 좋았던 곳을 두개씩 고르기로 했다. 첫째는 오름과 절물을 골랐고, 둘째는 바다와 절물을 골랐다. 나는 바다와 선흘분교를 골랐다. 짝꿍은 바다와 절물을 골랐다. 그래서 투표결과는 바다와 절물휴양림. 바다는 우리가 좋아하는 김녕성세기 해변. 어디부터 가야하나 고민하는데 첫째가 절물부터 가자고 한다. 바다는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복잡하니까. 오... 똘똘한데? ㅋㅋㅋ

간식을 싸가지고 절물로 향했다. 간식은 냉장고에 남아있던 오메기떡 세알을 챙기고, 달걀 세알을 삶아서 챙기고. 남은 과자들과 귤들을 챙겼다. 그런데 오후에 갈 바다 짐까지 싸야하니 너무 바빴다. 아침 일찍 서둘렀으나 결국 11시 출발. 아이들과 움직이면 아무리 서둘러도 11시에 집을 나서게 되는구나. ㅠㅠ 

지난번 절물에 왔을때는 서늘해서 추울 정도였는데 오늘은 습도가 높고 더웠다. 숲 한가운데 있으면 그나마 바람이 불때 시원한 감이 있는데 햇볕이 쬐는 길은 너무 더웠다. 온몸이 끈끈해지는 기분. 숲은 상쾌하려고 오는건데 아우... 제주의 여름을 마지막 날에서야 제대로 알게 됐다. 역시 가을에 와야되나봐... 그래도 절물의 삼나무는 아름다웠고 숲길은 포근했다. 두 번째 오는건 그것대로 맛이 있어서 아이들은 '지난 번엔~'하며 첫번째 방문을 기억했고 소소하게 달라진 것과 여전히 같은 것들을 말하느라 바빴다. 지난번에 너무 추워서 못했던 족욕장에 가서 발도 담갔다. 얼음장같이 찼지만 이래서 발을 담그는구나... 싶게 시원했다. 여름은 이런데서 보내는거지. 중간중간 나오는 쉼터에서 소소하게 간식 먹고 고리던지기도 하고 놀고 알차게 숲을 즐겼다.

정신없이 놀다보니 한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일단 가장 가까운 눈에 보이는 밥집에 들어가 밥을 먹으며 이후 동선을 짜본다. 원래 김녕에 가려고 했으나... 절물 가는 길에 눈에 들어온 '승마체험' 글씨를 보고 아빠가 오면 말타러 가기로 한 걸 기억해낸 남매들로 인해 계획변경. 그럼 내친김에 말도 타고 카약도 타자!

찾아보니 애들이 좋아할 승마체험장이 있었다. 옛날 승마장들이 주로 말을 타고 승마를 배우는 것이었다면, 여긴 먹이주기 체험도 하고 카페도 운영하고 부모와 아이가 시원하게 말을 한 번 타보는 경험을 하는 곳. 이런게 장사지... 라는 생각을 했다. 가족사진을 찍어주고 비싼 값에 사진을 판단 글을 블로그에서 봤는데 '막상 보면 안 살 수가 없어요'란 말을 보고 불길했다. 뭔지 너무 알겠는 그런 느낌... 사진 결과물은 역시... 이렇게 좋은 렌즈로 이렇게 예쁘게 애들을 찍어줬는데 안살 부모가 어딨어! 흑흑... 샀다. 전혀 강매하지 않았고 아무런 압박도 하지 않았고 단지 사진만 보여줬는데 그게 최고의 상술이었으며 알면서 샀다. 우리 추억을 돈주고 사자. 의미 있어! ㅋㅋㅋ

마지막 여행지는 하도리. 여긴 우리 부부가 아주 예전부터 좋아하던 곳이다. 철새도래지가 옆에 있고 하도리는 물이 빠지면 정말 가도가도 바닷물이 무릎까지도 오지 않는 곳이다. 드디어 카약 탑승! 예상은 했지만 애 둘을 데리고 카약을 타는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배 하나에 탈 수 없어 두개를 묶었더니 더더욱 ㅋㅋㅋㅋ) 속도감이 나서 쭉쭉 가야 재밌을텐데 마침 바람이 세서 어른 둘이(사실 내가 0.5인분의 힘...) 바람을 이기고 가려니 팔과 어깨가 너무 아팠다. 30분 탔기에 망정이지 1시간 탔으면 쓰러졌을 듯 ㅋㅋㅋ

카약에서 내려 마지막 바다놀이를 했다. 나는 바닷물이 찰랑한 모래에 앉아 제주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봤고, 첫째는 아빠랑 돌 틈에서 뭘 잡느라 바빴고, 둘째는 물놀이 모래놀이를 했다. 날이 더워 6시 넘어서도 바닷가엔 사람이 많았고 우리도 그렇게 거의 7시가 되도록 바다에서 놀았다. 이날 바다에서 가장 아쉬운 사람은 나였다. 그냥 그렇게 계속 앉아있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함덕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집과 미리 사두었는데 비가 너무 오는 바람에 결국 마지막 날에... 스파클러 200개를 샀더니 아주 원없이 신나게 반짝거리고 놀았다. 반짝반짝. 우리의 한달도 그렇게 반짝거렸지.

절물의 내 사랑들
긴장한 첫째
노를 저어라~
내사랑 하도리
제주의 마지막 저녁 풍경
마지막 일요일, 멘도롱장에서 산 모자와 원피스. 가방은 여행초반에 성산에서 샀는데 제주살이 내내 엄청 잘 썼다. 나 엄청 신났네 ㅋㅋㅋ

오늘은 오늘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을 좀 써야겠다.

어제까지 이렇지 않았는데 오늘은 정말 서울에 간다는 것이 인지된다. 중간중간 아이들이 말을 안듣고 뭔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을때, 나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을때, 체력이 딸려 혼자 모든 걸 해내기 벅찰 때 서울로 가고 싶었다. 안정적인 나의 공간 내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고 익숙했던 나의 패턴대로 살고 싶었다.

그런데... 한달이란 시간은 이곳의 삶과 시간을 나의 패턴으로 만들었다. 서울가면 밀려들 (내 능력으로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은) 일들, 계속해서 주어지는 내 역할, 시간에 쫓기는 삶, 넘치는 관계들이 있겠지.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서울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내고 있었던 것일까.

서울을 떠나 제주로 오면서 그것들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하게 살고 싶었다. 잠시 그것들을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완벽히 벗어나 살았고 그런 재미를 깨달아가고 있다. 바로 그런 시점에 나는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하루는 썩 괜찮았다. 
아침부터 짐을 간단하게 꾸려 상자 하나를 서울집으로 부쳤고, 카약도 타고 바다놀이도 하기 위해 하도리로 갔다. 예기치 못하게 하도리-평대까지 비가 쏟아졌고 종달 부근을 지나던 식당에서 소라도 먹고 성게미역국에 회덮밥도 먹었다. 

하도바다에서 조개잡고 놀고 싶었지만 비가 갑자기 많이 내려서 월정리로 갔다. 월정바다는 맑고 모래사장도 깨끗하고(처음으로 미역이 없는 바다였음) 좋았지만 젊은이들이 많아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음악이 들렸고(게다가 내가 싫어하는 최신댄스곡과 EDM...) 발만 씻는데도 500원을 받는 야박한 곳이었다. 아이들과는 물놀이를 하러 다신 오지 않을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집 녀석들은 아주 즐겁게 물놀이를 했다. 둘째가 잠시 해파리에 쏘이는 사건이 있었지만 다행히 가라앉았다.

집에 돌아와 어린이들은 낮잠을 잤고 나와 짝꿍은 저녁먹을 채비를 했다. 맛있고 후회없는 곳에서 회를 먹고 싶었으나... 애들이랑 움직이기엔 시간이 이미 늦어버려(게다가 이웃집의 지인도 같이 먹는 바람에...) 집근처에서 사올 곳을 찾았다. 하지만 찾은 곳들은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횟집들이어서 우리의 선택은 어처구니 없게도 하나로마트. 아쉽지만 가성비로 따지면 훌륭하다...라고 우리들을 스스로 다독이며 매운탕거리까지 장을 봐왔다. 

늦은밤 집을 치우다 뭔가 크게 잘못됐단걸 깨달았다. 한달살이의 우리는 어디가고 여행자가 되었단 말인가. 내년에 한달살이를 다시 하게 된다면 손님은 받되 여행은 셀프로 해야지. 나는 나의 속도로 살고 싶다. 그걸 하고 싶어서 이 먼 곳에 소중한 시간을 들여 온 것이 아닌가. 하루남은 평범한 일상을 평범하고 조용히 마무리하고 가야겠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하늘의 월정리 바다
해파리에 쏘였다.
오늘도 친구의 유니콘을 빌려타고
오늘도 모래를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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