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김녕성세기 해변에서 바지가 홀랑 젖는 바람에 아쉽게 집에 돌아온 둘째는 눈을 뜨자마자 바닷가 타령이다. 그런데 아침에 날씨가 너무 쌀쌀했다. 마을 광장에 아무도 나와 놀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오후에 날이 따뜻해지면 가자고 달래놓았는데... 그래도 입이 댓발 나왔다.

그러던 중 날이 점점 미지근해진다. '오, 이런 기세면 오후엔 덥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자!"를 외치고 이것저것 채비해서 나선다. 두번째 바다행이지만 역시 어른 혼자는 버겁다. 짝꿍과 있을 때는 나는 짐을 싸며 여러가지를 지시하고 그는 몸을 움직이면 됐다. 하지만... 내가 짐도 싸고 내가 몸도 움직이고 내가 잔소리도 해야하는 삼중고. "바다 가고 싶어? 그럼 이거 해야해."를 백번쯤 말한 뒤에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나도 수영복을 입고, 새로산 팝업 텐트를 개시하는 날이었다!(무려 제주로 배송!) 차 출발 직전 어젯밤 검색해두었던 김밥집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넣고 김밥집으로 출발.(깁밥 싸는 시간과 출발시간을 맞춘 이 피곤한 인생...) 김밥집에 정차 3분만에 수령, 김녕성세기해변으로!

도착한 김녕은 역시 한산했다. 함덕에서 느낀 돗데기 시장 느낌도 없었고 매점도 달랑 하나, 해변가에 무수한 상업시설이 하나도 없었다. 캬... 파라솔은 낡았고 대여하는 사람마저 없었다. 아이 좋아... 당당하게 텐트를 펴고 자리를 잡고 김밥부터 와구와구. 마음이 급한 첫째는 거의 쑤셔넣다시피 먹어서 체할까봐 걱정될 정도였고 밥먹기 느리기로 소문이 자자한 둘째도 빨리빨리 오물오물 먹고 모래로 가버렸다. 돗자리 하나 안깔린 해변에 혼자 당당히 텐트를 꺼내 앉아있노라니 자랑스러우면서도 살짝 걱정이 됐었는데 역시 첫댓글의 중요성... 옆에 나란히나란히 텐트가 펼쳐지고 돗자리도 쭉쭉 깔린다.

녀석들은 제주 해변의 모래질 연구에 나선 사람들처럼 모래를 파고파고 또 판다. 함덕에서는 사람들 기세에 눌려 쭈구리처럼 잘 못파더니 김녕에 오자 아주 자신있고 대범하게 토목공사에 나선다. 이것이야말로 대운하...

토목공사를 마치자 슬슬 물로 들어가본다. 수심이 얕아서 가도가도 다리가 다 잠기지 않을 정도의 바다. 첨벙첨벙 거리다가 첫째 녀석은 소라게 발견!!! 그때부터 시작된 해양생물 탐구는 두시간도 넘게 이어졌다. (지질학에서 생물학으로 옮겨감)

나는 텐트로 돌아왔는데 왔다갔다한 둘째와는 달리 첫째는 돌아오지 않는다. 텐트에서 너무 지겨워서 잠깐 졸기도 하다가 '내가 여기서 읽으려고 책을 가져왔었지...'하고 후회를 했으나... 애 둘과 이 많은 짐(옷, 신발, 수건, 모자, 썬크림, 먹을거)을 챙겨나오면서 책을 빠뜨린건 어쩌면 당연하단 생각도 들었다.

너무 지루해서 바다로 나갔다. 둘째도 따라오고 우리 둘이 재미나게 노는 것 같아보이니 첫째도 따라온다. 수영복을 입고 나서긴 했지만 해수욕 마무리를 시킬 생각을 하니 아득해져서 나는 허벅지까지만 담갔다. 그런데 이 대범한 녀석들... 엄마를 떠나 멀리멀리 다른 아저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간다. 깊이로 따지면 어린이들 허리 정도의 깊이지만 거리로는 아주 멀었는데... 본인들의 모험과 성공이 그렇게 재밌고 신났는지 몇번이고 나한테 왔다가, 멀리 갔다가를 반복한다. '아 아쉽다. 나도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나는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 지금만 사는 사람이었으면 내 삶이 더 즐거웠을까...'등을 생각하며 고뇌에 잠겼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멀리서 손을 흔들어줬다. (이때는 몰랐는데 고뇌에 잠기는 동안 내 뒷다리는 일광화상...)

점점 쌀쌀해지는 4시 언저리. 철수할 시간. 사실 이 과정이 하기 싫어 바다에 오기 싫다. 모래덩어리 애들을 데리고 나가서 모래를 털고 신발을 씻고 옷을 벗기고 모래를 털고 옷을 입히고 젖은 옷을 챙기고 닦았던 수건을 챙기고 젖은 신발을 챙겨서... 집에 오기. 몇번 욱하는 고비가 있었지만 오늘을 아름답게 마무리해야지. 몸은 고된데 뿌듯하긴 했다. 돌아오는 길 해안도로에 있는 멋진 카페에서 시원하고 맛있는 음료를 마시고 싶었지만... 참자. 너네랑 가봤자 시끄럽고 돈 아깝다. 나중에 혼자 와야지.

집에 돌아와 간식먹고 목욕하고 보니... 나도 첫째도 다리에 일광화상을 입었다. 둘째만 긴바지 래쉬가드. 그리고 셋 다 발등에도 화상. 잠시 집에서 놀고 있으라 하고 후딱 함덕 올리브영에 가서 알로에겔을 사왔다. 여기서 오늘의 깨달음.

사실 제주 도착 첫날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잘 지내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나는 하루종일 내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 너무 힘들다. 아이들과의 시간, 나만의 시간이 확실히 분리되는 것이 삶의 만족도가 올라간다. 하지만 제주에 한달 살러 와보니 아이들과의 시간은 서울보다 몇 배 더 즐거운데 내 시간이 없다. 아이들끼리 잠시 노는 시간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근무 중 대기시간에 불과하다. 즉 그것은 근무시간이란 얘기다. 지금 몸이 쉬고 있어서 휴게시간 같지만 언제 고객이 올지 모르는 마트 계산대의 캐셔같은 위치. 잠자는 시간 빼고 내 시간이 없는 5일이 너무 힘들었다.

이걸 왜 갑자기 오늘 깨달았냐고?
올리브영에 혼자 출입문을 여는 순간 깨달았다. 문에 치이지 않게 잡아줘야 하는 동행인이 없고, 주차장에 차가 올까 두리번 거리며 "손잡아!"외치지 않을 때도 깨달았다. '아... 좋다...' 서울이 널리고 널려 발에 채일 것 같은 올리브영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뒷자리가 고요하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음악이 라디오에서 나오는데 귀가길이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 내가 필요한건 이거였구나.

무계획으로 살아보는 숙제에 숙제가 하나 더 생겼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되 완벽히 분리되어 나만의 시공간을 구축하는 방법 만들기.
제주에 온건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분명 아니었다. 닷새를 아이들을 위해 살았더니 삶의 질이 하락했다. 이제 나를 위해 움직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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