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와서 나의 정체성을 자꾸만 확인한다. 어제 너무 피곤해서 집에 있기로 마음 먹은 날. 오전에 빨래도 두 번 돌리고 애들 광장에서 놀 동안 잠시 장도 봐오고(맛있는 빵과 반찬, 그리고 복숭아를 왕창샀더니 기분이 매우 좋아짐) 집에서 점심 먹고 낮잠자고 저녁도 집에서 먹고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더니 삶의 만족도가 올라갔다.

그렇다. 
나는 집순이였다.
밖에 나가 지치고 힘든 몸을 끌고 들어와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콕 박혀 먹고 자고(때론 귀찮아서 먹지도 않고) 책보고 영화보고 음악듣고 뒹굴뒹굴뒹굴뒹굴하면 충전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주에 와서 너무 신난 나머지 나도 잊고 내 체력도 잊고 칠렐레팔렐레 놀러다녔더니 아이들과 사이가 나빠질뻔한 상황까지 온 거다. 정확히는 사이가 나빠지는게 아니라 방치겠구나...

원랜 가까운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도 좀 빌려오고 하려고 했는데 마침(?) 낮잠자고 일어났더니 비가 주룩주룩. 비예보가 전혀 없던 날인데 비가 오는걸 보니 역시 제주날씨는 일기예보가 무의미하다.

둘째녀석이 아침부터 눈이 가렵다고 해서 보니 다래끼가 나려고 했었던지라 안과에 다녀왔다. 6시반까지 진료하는 병원이라 6시에 접수 마감일테니 부랴부랴 준비해서 갔는데(병원까지 8킬로) 6시5분... 매정한 간호사에게 최대한 불쌍해보이도록 사정해본다. 서울에선 이런 일엔 자존심도 있고 원칙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라 쿨하게 돌아섰을텐데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아... 진료시간이 6시반이라 마감인건 알고 있었는데요... 저희가 지금 20분 넘게 걸려서 겨우 왔거든요. 조천읍에서 온거라... 한번만 안될까요?" 
오늘 나의 의상도 한몫했는데 다리에 일광화상을 입어 너무 화끈거리고 아팠기에 인견바지를 입고 있었고 그 바지의 비주얼은 고쟁이에 가까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표정 어필이었는지, 사연 어필이었는지, 패션 어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간호사가 접수를 해주는데 주민등록상 주소를 적어야 한다. 음... '서울시 XX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설마 서울사람이라고 물르진 않겠지. 에라 모르겠다.

약을 한봉다리 타서 집에 도착. 호박, 양파, 버섯, 두부 잔뜩 넣은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 밥에 슥슥 비벼 먹으니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하루를 마무리. 애들도 흡족 나도 흡족. 별거 아닌 된장찌개에 이토록 찬사를 보내는 우리 셋을 보고 있노라니 역시 집밥이 주는 매력이, 힘이 있지. 

충전 잘 했으니 내일은 제주오일장 가야지! 신난다!
(하루종일 집에 있어서 사진도 없는 포스팅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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