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늘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을 좀 써야겠다.

어제까지 이렇지 않았는데 오늘은 정말 서울에 간다는 것이 인지된다. 중간중간 아이들이 말을 안듣고 뭔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을때, 나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을때, 체력이 딸려 혼자 모든 걸 해내기 벅찰 때 서울로 가고 싶었다. 안정적인 나의 공간 내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고 익숙했던 나의 패턴대로 살고 싶었다.

그런데... 한달이란 시간은 이곳의 삶과 시간을 나의 패턴으로 만들었다. 서울가면 밀려들 (내 능력으로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은) 일들, 계속해서 주어지는 내 역할, 시간에 쫓기는 삶, 넘치는 관계들이 있겠지.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서울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내고 있었던 것일까.

서울을 떠나 제주로 오면서 그것들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하게 살고 싶었다. 잠시 그것들을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완벽히 벗어나 살았고 그런 재미를 깨달아가고 있다. 바로 그런 시점에 나는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하루는 썩 괜찮았다. 
아침부터 짐을 간단하게 꾸려 상자 하나를 서울집으로 부쳤고, 카약도 타고 바다놀이도 하기 위해 하도리로 갔다. 예기치 못하게 하도리-평대까지 비가 쏟아졌고 종달 부근을 지나던 식당에서 소라도 먹고 성게미역국에 회덮밥도 먹었다. 

하도바다에서 조개잡고 놀고 싶었지만 비가 갑자기 많이 내려서 월정리로 갔다. 월정바다는 맑고 모래사장도 깨끗하고(처음으로 미역이 없는 바다였음) 좋았지만 젊은이들이 많아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음악이 들렸고(게다가 내가 싫어하는 최신댄스곡과 EDM...) 발만 씻는데도 500원을 받는 야박한 곳이었다. 아이들과는 물놀이를 하러 다신 오지 않을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집 녀석들은 아주 즐겁게 물놀이를 했다. 둘째가 잠시 해파리에 쏘이는 사건이 있었지만 다행히 가라앉았다.

집에 돌아와 어린이들은 낮잠을 잤고 나와 짝꿍은 저녁먹을 채비를 했다. 맛있고 후회없는 곳에서 회를 먹고 싶었으나... 애들이랑 움직이기엔 시간이 이미 늦어버려(게다가 이웃집의 지인도 같이 먹는 바람에...) 집근처에서 사올 곳을 찾았다. 하지만 찾은 곳들은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횟집들이어서 우리의 선택은 어처구니 없게도 하나로마트. 아쉽지만 가성비로 따지면 훌륭하다...라고 우리들을 스스로 다독이며 매운탕거리까지 장을 봐왔다. 

늦은밤 집을 치우다 뭔가 크게 잘못됐단걸 깨달았다. 한달살이의 우리는 어디가고 여행자가 되었단 말인가. 내년에 한달살이를 다시 하게 된다면 손님은 받되 여행은 셀프로 해야지. 나는 나의 속도로 살고 싶다. 그걸 하고 싶어서 이 먼 곳에 소중한 시간을 들여 온 것이 아닌가. 하루남은 평범한 일상을 평범하고 조용히 마무리하고 가야겠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하늘의 월정리 바다
해파리에 쏘였다.
오늘도 친구의 유니콘을 빌려타고
오늘도 모래를 판다.

 

아빠가 오면 하기로 한 여러가지 것들 중 오름오르기가 있었다. 아빠가 온 이후에 태풍도 함께 오는 바람에 오르지 못했다가 비가 그친 첫 날 오름에 갔다. 우리가 선택한 곳은 아부오름. 아이들과 오르기 쉬운 오름이고 동쪽에 있는 곳으로 주변 여럿의 추천이 있었다. 

아부오름에 도착하니 아래엔 소가 여러마리 있다. 신나서 소 옆에서 사진도 찍고 소 얼굴도 보고 그 옆 송아지도 보고 하는데 갑자기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소가 다가온다. "무서워..." 둘째가 사색이 되어 나에게 나가오고 사실 나도 너무 무서웠지만 내색하고 있지 않다가 짝꿍에게 속삭인다. "나도 너무 무서워..." ㅜㅜ 소를 피해 오름에 본격적으로 오른다. 경사가 가파르다더니 으앗 예상보다 가파르다. 계속 이렇다면 둘째는 못갈 것 같은데 이를 어쩌나... 싶을 때 쯤 정상이 보인다. "다 왔다! 저기다!"라고 하자 "힘들어..."를 호소하던 녀석도 힘을 낸다. 끝에 오르자마자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어서 아이들을 격려한다. (나 스스로도 힘을 내본다) 

오름 자체가 힘들다기 보다는 태풍의 영향으로 이틀간 거의 물폭탄이 떨어져서 땅이 젖어있는데 아침부터 햇볕이 쨍쨍하니 땅의 모든 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오름 둘레길(뭐라고 불러얄지...)에 서 있는데 습식사우나에 서 있는 기분. 지면에서 뜨끈한 수증기가 올라와 마치 찜통 위의 만두 같다.

그래도 숲길도 지나고 고사리도 보고, 공벌레도 보고, 나비도 보고, 꽃도 보고, 버섯도 보고 온갖것들을 구경하고 말도 걸며 걸으니 즐거웠다. 첫째는 "엄마, 여기 풀들이 우리한테 인사하는 것 같아. '안녕~안녕~' 이렇게 몸을 흔들어."라는 예쁜 말을 남겼고 둘쨰는 "엄마, 새들이 우리가 반가워서 인사하나봐."라고 거들었다. 온갖 새들이 예쁜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내가 너희의 그런 예쁜 마음을 만나고 예쁜 말을 들으려고 오름에 온거구나. 나도 너무 좋다 요 예쁘고 귀여운 녀석들아.

반바퀴쯤 돌았을까... 숲이 사라지고 오름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지형으로 접어든다. 아... 이것이 오름이구나... 감탄도 잠시... 무더위와 다시 만난다. 지열과 함께 수증기는 올라오고 햇볕은 쨍쨍 내리쬐고 어른도 아이도 땀이 주루룩 흐른다. 중간에 웨딩촬영하는 커플을 둘이나 만났는데 한복입은 팀은 보기만 해도 안쓰러웠다. 얼마나 더울까. (다음에 오름에 온다면 난 꼭 서늘한 날 와야지...)

오름을 돌며 먹기 위해 김밥을 사와서 중간중간 쉬며 먹다가 다 돌면 먹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더위에 김밥이고 뭐고... 시원한 걸 마시고 싶어졌다. 점심시간이지만 점심이고 뭐고 카페로카페로... 지나다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서니 예쁘고, 시원하고, 친절하시다. 우리집 두 녀석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짝꿍은 아아, 너무 힘들었던 나도 평소에 마시지 않던 커피를 주문한다. 나는 연유커피 샷은 한개만. 아이스크림이 나오기도 전에 우리 넷은 가게의 얼음물을 다 마셔버릴 정도로 너무 더운 날이었다. (우리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여름에도 물을 냉장고에 넣지 않고 마시는 집...)

더위가 가시고... 우리가 향한 곳은 김녕! 나와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바다로 아빠와 함께 가본다. 날이 좋기도 하고 멘도롱장이 열리는 날이라 주차장이 거의 만차다. 처음 왔을땐 열대도 없었는데. ㅎㅎㅎ

추위를 타서 물놀이를 좋아하지 않는 짝꿍은 일단 텐트를 지켰고, 나는 이렇게 습하고 더운날 하는게 물놀이지... 라고 생각하며 아이들과 물에 들어갔다. 바닷물이 찰랑찰랑 들어오는 모래사장에 앉아 첨벙거리다가 조금 추워져서 텐트로 돌아가서 바톤터치. 아빠와 아이들은 바위로 온갖 것들을 잡으러 떠나고 나는 아주 마음편히 누워서 쉰다. 아니 내가 이러려고 바다에 왔는데...

그동안 제주바다는 너무 추웠다. 제주의 이상기온 탓도 있었겠지만 가끔 있던 기온이 높은 날도 바람이 세서 너무 추웠다. 아이들은 아무리 길어야 세시간 놀았고 보통은 한시간반~2시간 정도 되면 둘째가 추워서 몸을 덜덜 떨어서 부랴부랴 집에 가야했다. 주차장에 세워서 찜통이 된 차에 타서는 셋이 모두 "아~ 너무 따뜻하다~"라면서 창문도 열지 않고 집까지 갔다.

그런데 이날은 물놀이를 위한 날 같았다. 바람이 없고 적당히 해가 나와서 물에 들어갔다가 추워지면 젖은 몸으로 밖에 나왔고 아무리 나와 있어도 춥지 않았다. 짝꿍은 미역던지기 놀이나 해양동물 채집 등 자신만의 놀이를 만들어 아이들과 놀았고 아이들도 오랜만에 바다에서 까르르 거리며 아빠와 놀았다. 지켜보던 내가 다 뿌듯하고 즐거웠다. 마음도 따뜻했다.

제주 내려온 첫째주부터 기다렸던 멘도롱장도 드.디.어. 구경했다. 제주에서만 입을 것 같은 원피스도 하나 사고, 보자마자 '아니 이건 원래 내껀가?' 싶었던 손뜨개 모자도 샀다. 둘째를 위한 예쁜 머리띠도 샀다. 군것질꺼리도 사먹었는데 소떡꼬치와 보말떡볶이, 한라봉쥬스를 먹었다. 물놀이도 하고 쇼핑도 하고... 두시 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한 우리는 여섯시가 되어서야 밥시간 때문에 정리했다. 물론 해수욕장 폐장 시간이기도 했고. ㅋㅋㅋㅋ

이렇게 흡족한 물놀이를 하고 싶었는데... 서울 갈 날 며칠 앞두고 하루라도 잘 놀아서 다행이네!

 

오름을 내려오고 있는 것 같은 이 사진은 사실 뒤로 걸어올라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카페에서 시원한 것들을 먹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더위먹었을 거다.
오늘도 어김없이 모래를 판다.
발이 많이 탔다. 이제야 사람 발 답네.
바닷물 뜨는 일 쯤은 이제 뭐 눈감고도...
바닷물에 파묻히는 중
아빠와 미역던지기 놀이

제주살이 스물다섯째날: 나에게 제주는

밤새 폭풍우가 몰아쳤고 아침에도 비는 계속됐다. 하지만 이젠 우리가 아는 그 '비'의 수준. 무얼할까 고민하다가 오늘 떠나는 친구와 '그래도 제주에 왔으니 바다는 가야지!'하며 함덕으로 향했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가는 길에 비가 완전히 그친다. 오호... 바람이 좀 불지만 오히려 바람 셌던 날들보다 괜찮았고 아이들은 모래놀이를 시작했다. 안나왔으면 어쩔뻔했어. 천만 다행이야!

바닷가에서 노는 애들을 바라보며 오후에 뭐할까 궁리하다가(어른 다섯, 애들 넷, 세 가정) 엄마들끼리 카페에 가기로 급결정. 점심을 먹고 우리는 카카오택시를 타고 월정리로 향했다. 선흘에서 월정리로 간게 이미 여러번인데... 내가 운전 안하니까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구름도 예쁘고 하늘도 예쁘고 나무도 예쁘다.

월정리에 도착해서 원래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cafe stay salty다.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ㅋㅋㅋ 근데 창가 자리는 만석이기도 했고 옆에도 모던하고 깔끔한 곳이 있어서 들어갔다. 바다뷰로 자리를 잡고 차와 케익을 먹고 있노라니... '아, 내가 이러려고 제주에 왔었지...' 싶었다. 이렇게 여유있게 바다보며 하염없이 아무생각 안하고 싶었는데, 나는 한달을 어떻게 지낸거지... 나를 돌아보게 된다.

지난 시간은 끊임없이 내가 어떤걸 좋아하고 어떤걸 싫어하는지 알게 하는 순간들이었다. 3주만에 짝꿍을 만났을 때도 이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게됐지만, 반대로 서울에서의 일상 중 어떤면을 싫어했었는지도 알게 됐다. (도착한지 이튿날 오전에 바로 깨달음) 아이들의 행동도 내가 싫어하는 포인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됐고, 나는 애들과 뭘 하며 놀 때 즐거운지 알게됐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알게됐으며 나에게 지나친 고요함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됐다. 내가 얼마나 계획적인 인간이며, 그걸 작게 어길 때는 기쁘지만 궤도를 벗어나는 것은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완벽한 동선에 물개박수치며 좋아하고 쓸모없는 움직임을 싫어한다. 낮이든 밤이든 일정시간 나만의 시간이 보장되어야 한다.

여러명이 방문한 날에도 그랬다. 누군가가 찾아오는게 반가운 일이긴 했지만 여러사람이 만족할만한 일정을 짜는게 나에겐 즐겁지 않았으며, 가족의 여행은 오롯이 우리만일때 더 좋았다. 하루종일 붙어있는건 부담스럽고 서로의 시간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이 좋다. 물론 나랑 함께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ㅋㅋㅋㅋ 아무튼 그와 나의 다른 점도 새삼 복습했다.

제주에서의 생활이 아직 며칠 남았지만... 제주에 다시 오고 싶은지 나에게 묻는다면 여전히 나는 다시 오고 싶다. 다음에 다시 오면 첫째주에 했던 아이들과의 시행착오를 안할거고 어떻게 살면 더 좋을지 알겠다. 물론 몸은 또 힘들겠지만 그래도 더 즐거울 방법을 알 것 같다. 

쉬려고 온 이곳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알게하는 그런 곳이다.
그런게 휴식의 이유인가...

밀크티도 맛있고 케익도 맛있고... 바다도 좋고.
비오는 월정리를 혼자 5분 정도 걸었는데 그렇게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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