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증 갱신을 위해 오랜만에 증명사진을 새로 찍었다.


대학생 시절 찍었던 사진들을 생각해보면, 물론 보정은 하지만 그래도 원판 자체도 성의있게 찍어줬던 것 같다.

사진에 대해 잘 아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는 빛을 이용한 뽀샤시 효과였던 느낌.


작년에도 급하게 증명사진을 하나 찍었는데 이른바 '뽀샵'을 너무 많이 해서 누군지 모르겠는 지경인 사진이 완성됐다.

그래서 새롭게 찍으러 간건데 오늘 갔던 사진관은 무슨 자신감인지 보정과정을 바로 옆에 앉아서 볼 수 있게 했다.

'오호. 잘됐다. 뭘로 보정하는지 구경이나 하자'


그런데 포토샵이 한글버전이다.

'이런. 쪼렙인데.'


사실 사용한 툴은 뻔했다.

힐패치로 잡티를 겁나 없앤다.

그리고 리퀴드 툴로 윤곽선 보정, 눈 크기 보정, 코 보정, 이목구비 좌우대칭 보정.

그리고 클론 툴을 이용한 머리카락 채우기.

번 툴을 이용한 눈썹 다듬기, 입술 다듬기.

전체 피부톤 보정.


그런데 손의 속도가... 빛의 속도다.

단축키+마우스 조합이 프로게이머인줄.


아무튼... 그 사진관을 나오며 든 생각은...

포토그래퍼 한명 섭외해서 사진관을 차릴까...


증명사진은 더 이상 빛을 이용한 기술이 아닌듯 하여 씁쓸했다.

진짜 내 얼굴을 잘 나오게 찍어줄 곳은 어디인가...

(아... 비싼 곳은 가능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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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할머니는 솜이불을 좋아하셨다.
물론 옛날에야 목화솜밖에 없었으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화학솜이 많이 나오고 나서도 외할머니는 목화솜요, 목화솜이불을 좋아하셨다.

어릴적 외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시면 늘 하는 집안일이 있었는데, 이불 홑창을 다 뜯어 빨고 다시 꿰매놓는 것과 장독 뚜껑 열어놓기.
그러고보면 우리 엄마는 이 분야에선 부지런하진 않았던 것 같다. ㅋㅋㅋ

그 이불 홑창을 꿰매려면 목화솜과 홑창이 따로 놀지 않도록 잡아줘야 하는데 외할머니는 항상 나보고 이불 가운데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나는 신이 나서 가운데 앉아있다가 뒹굴다가, 이불에 수놓아져 있는 새가 진짜 99마리인지, 물고기가 정말 99마리인지를 세고 또 세었다.

외할머니집에 가도 할머니는 이불을 그렇게 뜯어서 빨고 꿰매셨다.
우리집에서와 다른 것은, 외가집에선 이불 홑창에 빳빳하게 풀도 먹였다는 것.

늘 빳빳하고 햇볕냄새가 나는 이불을 깔고 덮을 수 있어서 외갓집에 가는게 나는 엄청 좋았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평소 혈압이 높으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젊은 나이에 쓰러지신거다.

신여성으로 늘 양장투피스를 즐겨입고 유치원에 할머니 초청하는 날에도 신식 구두를 신고 파마머리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오시던 우리 멋쟁이 할머니는 그 이후 거동이 불편해지고 밥도 늘 흘리고 먹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더이상 풀먹인 이불도 만날 수 없었다.


그런 우리 외할머니의 이불이... 약 7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엄마를 거쳐 우리집에 왔다.

우리 애들도 깔고, 손님도 깔고 자던 목화솜요.


오래되어 솜을 틀어 새 이불처럼 깔려고 솜틀집을 찾고 또 찾았다.

인터넷에 많은 업체들이 있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외할머니의 소중한 이불을 아무데나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미연언니가 명랑솜틀집을 알려줬다.

네이버, 구글을 검색해도 후기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블로그를 하는 요즘 세대들은 솜이불을 쓰지 않고, 솜도 틀지 않는다.

그래도 오래된 동네의 솜틀집이고 공장에 보내는 방식이 아니라는 주인아저씨의 말에 가져가려고 한다.


그 이불을 보내려고 주말에 요 커버를 뜯는데...

커버가 겉돌지 않게 한땀한땀 꿰매놓은 외할머니의 솜씨가 보였다.

첫 실을 뜯는데 망설였다.

이걸 뜯어야 하나...

뜯고 또 뜯는데...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이불이 겉돌지 않을 정도의 실밥.

그리고 외할머니가 즐겨하던 +모양의 중간중간 실매듭.

이불 가운데서 뒹굴던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기억났다.


실을 뜯다 주책맞게 눈물을 글썽거리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와 깔깔 웃으며 외할머니의 꼼꼼함과 엄마가 지겨워할만큼의 깔끔함에 대해 흉을 봤다.

엄마도, 나도 안다.

우리가 얼마나 서로의 엄마와 외할머니를 그리워 하는지.


우리 엄마는 나중에 죽으면 우리 애들에게 어떤 것으로 기억될까.

우리 애들은 무엇을 추억삼아 외할머니를 떠올릴까.


우리 외할머니가 무척 보고 싶다.






라은이는 외모는 나를 닮았지만 성격은 남편을 닮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고 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센 라은이를 보고 나를 닮았다고 하는데, 나의 그런 성격은 후천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굉장히 다른 사람의 의견에 맞추고, 불편해도 참고, 이래도 저래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상대방이 편한게 내가 편한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불편하고 싫지만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맞다고 생각하면 싫어도 참는.

지안이의 성격이 나를 닮았다.

(조직의 논리로 나를 누를 때 상당히 많은 경우 나는 수긍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같은 일인데.)


아무튼,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둥근외모에 둥근성격으로 살다보니 '바보같다'는 소리를 듣는 일도 있었고 관계에서도 자꾸 치였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일이 많았던 가정사에 나는 더이상 둥근 성격을 가질 수 없었다.


사춘기 이후 나는 내 주장을 강하게 하고, 겉으로도 강해보이는 말투와 행동을 일부러 했던 것 같다.

그래야 무시당하지 않고, 손해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아무튼 그 이후에 대학에 입학해서도 계속 나는 모나게 살아왔다.
그게 내가 나를 방어하고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어느새 나는 그런 성격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5년간 육아에 집중하면서 원래의 기질과 후천적 성격 사이에 내가 있게 됐다.
그래서 나는 순간순간 고민한다.
어떤 마음이 진짜 나의 것인가.
어떤 판단이 진짜 내 생각인가.

서른이 훌쩍 넘어 마흔이 더 가까운 나이에 뒤늦게 자아성찰을 하고 있는건...
오늘이 일요일 밤(혹은 월요일 새벽)이어서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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