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다녀가고 나서 제주엔 다시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도착한 날부터 비는 불규칙적으로 오다 그치다를 반복했는데 신기하게 지인이 방문한 기간동안 한번도 비가 오지 않았다. 더 신기하게 그가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간 순간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기도 했고, 4일간 빠듯하게 관광객 모드로 놀았던 우리는 느긋하게 늦잠을 잤다. 정확히는 아이들이 늦잠을 잤다. 아무래도 옆방으로 바로 달려가 놀자고 조를 사람이 없으니 깊이 잔 것 같았다. 6시반이면 일어나던 첫째는 7시반에 일어났고 둘째는 심지어 8시반이 되도록 쿨쿨 잤다. 나도 느지막히 일어나 아침을 챙겼다.

오늘은 집순이모드로 동네 우체국에 들러 둘째가 단짝친구에게 쓴 엽서를 서울로 보내고, 조천읍도서관에 갔다. 블로그 검색해보니 육지에서 쓰던 대출카드로 가능하다기에 방문했는데 너른 주차장을 보니 제주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 자체는 아담했고 창이 많은 도서관이라 표지색이 바랜 책들이 꽤 있었다. 서울의 도서관은 창이 너무 없어서 답답할 지경인데 창이 많으니 이런 단점도 있구나 싶었다. 유아동 책은 따로 모여있어서 초등학생인 첫째는 스스로 책을 골라와서 읽었고, 아직 글을 술술 읽진 못하는 둘째는 제목을 보고 책을 골라와 내가 읽어줬다. 나는 신간코너에가서 책을 골랐고 김연수 장편소설과 이슬아의 책을 득템. 대출은 1인당 5권까지 되고, 육지에서 쓰던 대출카드를 가져오면 제주로 이관해준다. 다시 육지로 돌아가서는 육지로 이관하면 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반찬가게와 하나로마트를 들러 간단히 장을 보고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가기 전 예약취사, 빨래는 예약세탁 해놓으니 모든 시간이 딱 맞아떨어졌다. 이렇게 시간이 딱 맞아떨어지면 나는 무척 기쁘다. 나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 뭔지 새삼 또 깨닫게 된다.

오늘은 집에 있기로 마음먹은 날이기에 둘째는 낮잠을 자고 첫째는 수학공부를 좀 했다. 학교에서 곱셈을 배우고 있을텐데 우리도 조금 해봤다. 학교에서 수학을 배우면서 어렵다고 한 적이 없는데 배우지 않고 혼자 풀어보려니 어려웠던 모양이다. 몸을 배배꼬고 책 좀 보고 다시풀면 안되겠냐고 한다. 처음엔 나도 엄마모드로 '조금 더 해봐'라고 하다가 20여년전 경험을 살려 과외선생님 모드로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첫째가 수학문제를 푸는 사이 나는 빌려온 책을 후루룩 읽었다. 그래, 나 제주에 와서 책 좀 읽고 싶었어.

낮잠 자는 둘째 옆에서 잠시 눈을 붙였는데 눈을 떠보니 두시간이 지나있었다. 나도 많이 피곤했구나. 낮잠 자고 일어나서 보기로 약속한 토이스토리3를 틀었다. (이걸 보려고 서울집에서 hdmi케이블을 챙겨왔다...) 극장에서 아이들과 4편을 보기 위한 준비...ㅋㅋㅋ 소문처럼 후반부에 눈물이 주루룩... 엉엉 고마웠어 나의 장난감들.

저녁을 먹고 세수하고 자려는데 씻을 준비를 하던 둘째 녀석이 오빠랑 웃긴 얘기를 하다가 바닥에 쉬를 했다. 화가 났다. 이 녀석은 깔깔 거리다 자주 오줌을 지리곤 하는데 제주에 와서는 그게 너무 심했다. 차에서도 찔끔, 집에서도 찔끔. 집에서는 그나마 나은데 차에서 그러면 대책이 없어진다. 가까운 10분 이내 거리면 집에 돌아오면 되지만 30분 넘는 거리에 나가서 그러면 나는 패닉과 카오스의 상태가 되어 분노가 휘몰아친다.

이런 일이 일주일째 반복이 되니 더더욱 화가 났다. 두 녀석이 차에 떠들다 웃기 시작하면 나는 긴장이 되기 시작하고 왠지 이쯤이면 오줌을 쌀 것 같은 단계가 되면 경고한다. "이제 웃기는 얘기는 그만하자. 쉬 쌀거 같은데?" 이런 나의 부드러운 경고를 들을 턱이 있나. 알겠다고 대답하지만 계속 낄낄 거린다. 두번 세번 더 얘기하지만 내 얘기는 귓등으로 듣는다. 그렇다면 결론은 둘 중 하나인데 ①화를 내며 둘의 대화를 중지시키고 다행히 참사는 막는다. ②결국 참사가 벌어지고 나는 화를 낸다. 뭐든 나는 화를 내는 엄마가 된다.

걸레로 바닥을 닦으며 왜 나는 화가 나는가, 왜 나는 뭐든 화내는 엄마가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다보니 너무 슬펐다. 이러려고 온게 아닌데. 나는 잘 놀고 싶은데. 나도 웃기만 하고 싶은데. 나는 왜 애들이 깔깔거리기 시작하면 긴장하고 화를 내야 하는가. 두 녀석을 다 씻기고 나서 결국 나는 눈물이 났고 "엄마도 웃는 엄마 좋은 엄마 하고 싶어. 그런데 화를 내야 쉬를 안싸거나, 쉬를 싸서 화를 내게 돼. 맨날 화내는 엄마가 된 것 같아서 너무 속상해... 엉엉엉" 고백했다. 내가 울자 첫째는 엄마가 속상해서 자기도 속상하다며 울었고, 둘째는 엄마가 화를 내서 속상하고 화를 내면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며 울었다. 셋이 모두 엉엉 울게 된 제주의 밤.

나는 왜 화가 나는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오줌을 싼 후 내가 맡아야 하는 노동의 양이 많아져서인지, '예측되지 않은' 불상사가 싫은지, 일곱살이 되었음에도 쉬를 싸는 자식이 못마땅해서인지, 여러번 주의를 줬으나 내 말을 허투루 듣는 녀석들 태도가 맘에 안드는건지, 매일 반복되는게 지겨워서인지, 이 상황에 출구가 없어서인지... 모두 다 인지. 모르겠다 나도. 확실한건 난 이 상황이 싫다. 그리고 벗어나고 싶다. 대체 왜 나는 이 문제로 매일 화내는 엄마로 변신해야 하는가. 

내일은 바닷가 카페로 가야지. 나는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마음의 평온을 찾아야지. 내 마음의 소용돌이는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따라가봐야지.

목요일에 놀러왔던 지인이 서울 가는 날이다. 어제 저녁부터 이모가 간다고 서운해하던 아이들은 마지막 날인지라 더 많이 놀고 싶다.

오늘 첫번째 코스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선흘분교. 이모랑 꼭 가고싶다고 해서 시소도 타고 정글짐도 오르고 그네도 타고 축구도 했다. 바람이 엄청 불고 쌀쌀한 날이었는데도 첫째는 축구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교문이 하루종일 열려있는 학교. (사실 '문'이 없다) 시간만 되면 닫히고 드나들 때 마다 출입기록을 쓰고 신분증을 맡겨야 하는 서울의 학교는 얼마나 삭막한가. 두번째 왔지만 여전히 선흘분교는 매력있다.

함덕에서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멘도롱장이 이번주는 김녕에서 열린다고 해서 오늘 물놀이는 급하게 김녕으로 수정. 난 워낙 김녕이 좋으니까 괜찮아! 점심무렵 물놀이를 시작해 놀다가 멘도롱장에서 구경하고 집에 들어오는 일정으로 출발했다. 잔뜩 흐리던 하늘이 개고 햇볕이 쨍 나는게 물놀이하기 진짜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김녕에 도착하자 바람이바람이... 텐트를 치는 것도 어렵고 무사히 텐트를 치고 줄로 매어놓았지만 놀아도놀아도 추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모래를 파고 또 파고. 추우니 물에 못들어가서 정말 모래만 계속 파서 한라산 모양의 모래성을 완성했다. ㅋㅋㅋㅋㅋㅋ 부산이 고향이어서 어릴적 바닷가에서 모래놀이를 아주아주 많이 했다는 지인 덕에 아이들은 아주 만족스러운 성을 만들었다. 아무리 땅을 파고 놀아도 너무 한적한 바닷가가 수상해서 인스타를 살펴보니 강풍으로 멘도롱장은 취소. 아놔. -_- 멘도롱장 날짜에 맞춰 바다에 가느라 맑은날 못놀았는데 이럴줄 알았더라면 금요일에 바다에 갈걸!!! 

얼른 집에 돌아와 씻고 월정리 구경. 월정리는... 성수동 같았다. 골목골목 가정집들은 거의 음식점이나 커피숍, 소품점으로 바뀌어 있었고 바뀌어 가고 있었다. 심지어 해안도로에는 쇼핑몰도 생겼다. 상업의 손길은 얼마나 뻗어나가려나... 덕분에(?) 예쁜것도 꽤 사고 많은걸 구경해서 신났지만, 삼청동이나 연남동처럼 변하지말기를. 변해도 조금 천천히 변하기를. 근데 그것도 그냥 내 욕심이겠지.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공항으로 출발. 날이 맑았더라면 해질녘 하늘이 진짜 예뻤을텐데 아쉽다. 이모와의 마지막 한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차 안에서도 끊임없이 퀴즈를 내던 우리집 녀석들. 그치. 나도 이모랑 삼촌이 우리집에 놀러오면 헤어질 때 마다 가지말라고 울었던 것 같아. 그래서 나 자는 사이에 몰래 집에 가기도 했었지. ㅎㅎㅎ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 역시 있던 사람이 가는건 누구라도 허전한 일이다. 그것도 나흘을 거의 함께 했더니 더더욱. 찾아왔던 이가 서울로 떠나자 비로소 내가 여기 살고 있구나 싶다. 비록 한달살이지만 여행자와 사는 사람의 마음은 이토록 다르구나. 나는 내일부터 다시 제주에서의 삶을 살아야지.

공항가는 길. 야자수가 있는 저녁 길을 보고 있노라니 괌인지 제주인지.

절물휴양림은 내가 제주에서 좋아하는 곳 중 하나다. 좋아해서 가고 또 가도 좋은 그런 곳. 지인이 한 번도 안가봤다기에 아이들과 또 방문. 삼나무 숲은 여전했고 제주 특유의 식물들이 주는 남도의 느낌도 여전히 좋았다. 데크가 잘 깔려서 애들과 다니기에 좋고(어른이 걷기엔 좀 아쉬움이 있지만) 중간중간 평상도 많아서 간식 먹기도 좋고. 두세시간 숲에서 놀고 걷고 했는데 날씨도 선선하고(선선해서 오히려 움직이지 않으면 추울 정도) 공기도 워낙 좋아서 숲에서 나오는데 몸이 가뿐했다. 애들이 좀 커서 3시간반짜리 코스도 함께 다녀오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까마귀가 많아서 둘째의 장기인 까마귀소리 따라하기도 하고(정말 똑같다), 숲 한가운데 그네도 타고, 질경이를 따서 풀씨름도 하고, 고사리가 진짜 많다고 감탄도 했다. 사진은 못찍었지만 오늘의 수확(?)은 노루인지 고라니인지... 숲에서 풀 먹는 녀석을 만난 것! 숲길을 한참 걷는데 풀숲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길래 걸음을 멈추고 뚫어져라 쳐다보니 갈색 털의 몽실몽실한 녀석이 오물오물거리고 있다. 그녀석은 사람에 대해 적절한 긴장과 친근감을 가지며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어 숲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걸을까? 하는 아쉬움이 살짝 남았지만, 무리하게 걷다 지쳐 본 어제의 경험을 떠올리고는 집으로 향했다. 우린 반짝 놀고 집에 돌아갈 관광객모드는 지양하자. 들어오는 길에 함덕에 잠시 들렀는데 상시적으로 있는 해변의 가게들 중 헤나를 하는 곳이 있어서 모두 헤나 한개씩. 모두 인생 첫 헤나였는데 7세, 9세에 인생 첫 헤나라니 아이들이 부러웠다. 너희들은 자유로운 영혼이 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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